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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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었다가 영영이었다가 2023.12
It was a moment It was forever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오래전에 최영미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시에 빗대어 나의 2023년을 돌아보면 꽃처럼 피었던 적도 없는데, 이제 잠깐 사이에 져버릴 것이 분명하다. 삼백예순다섯 날 중 어떤 날은 늪처럼 깊은 수렁이 되어 내 야윈 발목을 잡았고 어떤 날은 우산 없이 만난 소나기처럼 온몸을 흠뻑 적셨다. 어느 하루 쉽게 지나간 날 없었다. 그런데, 아주 잠깐처럼 느껴진다.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선배의 추모식에 갔었다. 선배의 뜨겁고 여여(如如)했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그를 추억하고 생전의 에피소드를 나누며 점심을 같이 먹었다. 선배가 늙기를 멈추고 있는 동안 나만 차곡차곡 나이 들어서 선배보다 늙어버렸다. 5년 전..
2023.12.30 -
핵인싸는 아니지만 핵개인입니다 2023.11
I’m not a super insider but a nuclear individual 지금은 출산을 장려하고 다둥이를 둔 집을 부러워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형제가 많은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요즘의 저출산 추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산아 제한 정책이 정부 주도로 펼쳐졌다. 아이를 적게 낳자는 정책 홍보를 위한 공익광고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960년대, 가족계획협회는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고 세 명의 자녀를 세 살 터울로 35세까지만 낳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말자는 3•3•35운동을 전개했다. 이 때의 표어가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가족계획의 표어는 3•3•35에서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었다. 불임을 위한 정관..
2023.11.30 -
늦기 전에, 늦었어도! 2023.10
Before it’s too late, and even if it’s late! 투게더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 빙과회사 빙그레가 지난 7월 15일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서 학생 독립운동가를 위한 ‘세상에서 가장 늦은 졸업식’을 열었다. ‘세상에서 가장 늦은 졸업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퇴학을 당해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학생 독립운동가를 위해 마련한 명예졸업식이다. 명예 졸업장을 받은 사람들은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안에 퇴학 기록과 복원 가능한 사진이 남아있는 학생 독립운동가 중 후손들의 동의를 받아 선정한 94명이다. 150여 명의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빙그레, 국가보훈부 관계자들이 참석한 졸업식에서는 김찬도 선생이 홀로그램으로 복원된 영상을 통해 졸업사를 낭독했다. 김찬도 선생은 수원지역의 학생운동 ..
2023.10.31 -
너무 많은 것을 본 사람에게 필요한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영상 2023.9
A uniquely satisfying video for those who've seen it all 아침에 눈을 뜨면 휴대폰을 먼저 잡는다. 시간을 확인하고 날씨를 보고 유튜브로 뉴스를 듣는다. 벌떡 일어나는 대신 페이스북에 들어가 남의 담벼락에 올라온 글을 보거나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이메일을 확인한다. 업무 관련 메일 계정엔 주로 우리 회사에서 집행한 광고 효과를 보고하는 리포트와 광고·마케팅 동향을 알려주는 기사가 도착해 있다. 개인 메일함은 잡지나 신문, 도서관, 문화 단체 등에서 온라인 구독 서비스 형식으로 보내주는 인터넷 잡지와 뉴스 스크랩들이 차지하고 있다. 가끔 청구서나 결제 확인 메일이 있지만, 안부를 묻는 사적인 편..
2023.09.14 -
처음인데, 벌써 그립다 2023.8
Even though it's a new to me, I miss it already 길고 지루한 장마의 한가운데서 8월의 칼럼을 고민한다. “8월” 하고 가만히 소리 내어 불러본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8월의 풍경으로 발을 옮긴다. 뜨거운 태양과 눈부신 파도, 울창한 숲이 거기 있다. 산과 바다, 하늘과 구름, 물장구치는 소리, 깔깔 웃는 아이들 소리… 그렇다, 내 기억의 8월엔 방학과 휴가가 있다! 내 평생 처음 맞이하는 2023년의 8월이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시간처럼 그립다.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아깝고 애틋하다. 수많은 8월을 살았고 지나왔는데, 다시 새로운 8월이 눈앞에 있다. 해마다 오는 8월인데 해마다 처음인 것처럼 새롭고 낯설다. 이번 8월,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
2023.08.17 -
태평염전에서, 태평하다 2023.7
Peaceful at Taepyuong Salt Farm 마음에 스산한 바람이 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인생을 잘못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에 햇볕 아래서도 자주 암전을 느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을 만큼 부끄럽거나 후회스러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사는 동안 겪었던 잃어버린 사랑, 배신당한 우정, 보답받지 못 한 정성, 무시당한 마음…. 그 모든 기억이 한데 모여 너는 실패자라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승객이 꽉 찬 지하철 안에서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기도 했고, 한밤에 잠이 깨면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죽어버린 듯한 슬픔이 북받치기도 했다. 벗어나려면 도망쳐야 했다, 잊어야 했다, 위로받고 스스로 위로해야 했다. 우울한 도시를 떠나 내가 찾은 곳은 전라남도 신안의 작은..
2023.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