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4. 09:04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Furniture is moving
예전에 통신사 광고 중에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캠페인이 있었다. CF에서 여자는 사랑하던 남자를 차고 다른 남자에게로 가는 내용이다. 그런 자신을 변호하는 말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말한다. 통신사를 마음껏 바꾸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거다. 사랑이 움직이듯이 가구 역시 움직이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믿기 힘들지만 서양 주거의 역사에서 가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늘 움직여 왔다. 그 증거는 가구를 뜻하는 단어에 남아 있다. 불어의 ‘뫼블르(meuble)’와 ‘모빌리에(mobilier)’, 이태리어 ‘모빌리(mobili)’, 스페인어 ‘무에블레(mueble)’, 독일어 ‘뫼벨(Möbel)’은 모두 가구를 뜻하는 단어로서 한결같이 이동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고대 로마제국의 찬란한 문화 때문에 우리는 서양은 안정된 주거 생활을 지속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유럽은 고대의 발전된 건축술은 물론 생활 문화 전반이 상당히 퇴보했다. 이른바 암흑의 시대라고 부르는 중세는 르네상스가 탄생하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와 북유럽의 플랑드르처럼 부유한 일부 지역을 빼면 17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토굴 같은 오두막에서 궁상맞은 생활을 했다.
서양의 독보적인 생활문화라고 할 수 있는 개인용 의자나 포크가 대중화된 것도 17세기 이후다. 그 전까지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등받이가 없는 긴 스툴에 여러 명이 앉아 밥을 먹었다. 프랑스 왕실에서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상속녀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나중에 앙리2세가 되는 프랑스의 왕자에게 시집간 1533년부터다. 그 결혼을 계기로 화려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가 프랑스 왕실에 보급되었다. 하지만 포크는 상당한 사치였으므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오랫동안 포크를 사용하지 못했다. 동시대 영국의 유명한 왕인 헨리8세 역시 포크 없이 손으로 밥을 먹었다.
17세기 이전까지는 유럽의 상류층이라도 가구가 풍부하지 않았다. 그것은 귀족의 라이프스타일과도 관련이 있다. 귀족들은 오늘날의 집 없는 한국인들처럼 이사가 잦았다. 곳곳에 흩어진 영지를 관리하기 위해, 또는 다른 이의 후원을 받기 위해, 또는 왕의 부름을 받아서 등등의 이유로 끊임없이 이동했다. 따라서 가구는 육중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가지고 다니기 쉽게 소박하고 실용적으로 디자인했다. 거대한 성이나 궁전에서는 로열 패밀리라고 해서 독립적인 공간에서 살지 않고 커다란 방에서 가족, 친지, 수행원들과 같이 기거하며 놀고 일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더구나 돌로 만든 성은 겨울에 대단히 춥기 때문에 고귀한 공주라고 하더라도 하녀들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 늘 함께 하는 이들은 밥을 먹을 때도 무리를 지어 이동을 했으며, 필요한 가구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이동식 가구는 검소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가구에 특별한 애정을 갖지도 않았으며, 많이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중세 유럽인들의 가장 중요한 재산목록은 늘 가구가 아닌 이불 같은 직물이었다.
이동식 가구의 대표적인 사례로 궤짝과 변기를 들 수 있다. 궤짝은 소중한 옷이나 이불 같은 직물을 넣어야 하므로 가장 중요한 가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궤짝의 뚜껑은 아치형, 정확히는 원통 볼트(barrel vault) 형이 가장 흔하다. 이런 형태는 이동을 고려했음을 반영한다. 이동 중에 비가 오면 뚜껑에 비가 고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일종의 물매가 있는 지붕이다. 보물을 담는 해적 트렁크가 이런 형태라는 것을 영화에서 흔히 본다. 해적들 역시 끊임없이 이동하지 않는가. 변기 역시 이동식 가구 중의 하나였다. 이런 변기는 대개 뚜껑을 닫을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뚜껑을 닫아 놓으면 영락없는 궤짝이다.
프랑스의 루이14세는 절대 왕권을 확립하고자 예술을 적극 활용했다. 그런 예술성은 건축과 회화는 물론 왕실에서 쓰는 가구에도 적용되어야 했다. 이때부터, 즉 바로크 시대부터 단지 움직임을 고려한 실용적인 가구가 아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가구, 특히 실내를 독보이게 하는 가구들이 탄생했다. 가구는 단지 독립된 사물을 넘어 실내와 결합되었고 실내의 꽃이 되었다. 실용성을 넘어 과시적 용도가 중요해짐에 따라 이동이라는 기능은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여성 한 명이 앉는 셰이즈 롱(chaise longue) 같은 길고 무거운 의자가 대표적이다. 중세에도 이동을 고려하지 않는 의자가 존재했지만, 그것은 오직 왕이나 귀족 집안의 가장을 위한 것뿐이었다. 이제는 여성과 자식들을 위해서도 이동하지 않는 의자들이 만들어졌다. 토탈 디자인의 일환으로서 장식품에 가까운 캐비닛, 콘솔 테이블, 코모드 같은 가구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까지 가구는 이동성이라는 기능을 잊은 것 같았다. 특히 상류층에서는 크고 무겁고 장식적인 가구들이 대부분이어서 이동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구에서 이동의 문제가 다시 부각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하인 없이 주인이 직접 청소와 관리를 해야 하는 시대가 되자 가구들은 검소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동성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가벼워야 관리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무 대신 더 가벼운 강철관, 합판, 플라스틱 같은 재료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동성을 고려하자 재료가 바뀌고 재료가 바뀌자 디자인도 바뀌었다.
20세기에는 그 전 시대보다 대규모의 군중이 모여서 행사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호텔의 대형 홀이나 컨벤션 센터 같은 곳에서도 이동식 가구가 필수적이다. 기업에서도 한 곳에서 가만히 앉아 일하는 것보다 이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생활 곳곳에 가변형 공간이 점점 많아진다. 이러 사회적 요구가 가구에 이동성을 부여했다. 움직이는 집이 나올 정도니 말이다. 교통의 발달, 정치적 불안 등으로 사람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이동을 많이 한다. 루이비통 같은 브랜드가 생산하는 여행 가방은 가방이라기보다 움직이는 캐비닛에 더 가깝다. 어쩌면 한 곳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은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아주 잠시였는지도 모른다. 이동하는 가구가 많아진다는 것은 가구가 자기 정체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인 셈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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