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7. 09:05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Effects of uniforms
나는 서촌에 산다. 이곳은 매일 크고 작은 시위가 있고 토요일에는 대규모 시위가 있다. 평일 시위는 다양하지만, 토요일 시위는 거의 예외없이 애국 보수 단체의 반정부 시위다. 요 몇 달 동안 시위가 없는 토요일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다. 시위가 있는 날이면 버스도 다니지 않는다. 토요일에 친구들과 함께 인왕산에 오르기로 한 날 오후에 밖을 나왔다. 아니 웬 일인지 시위가 없다. 요 몇 달 사이 시위가 없는 토요일은 처음이다. 경복궁역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해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한 노인이 천천히 정류장 쪽으로 걸어온다. 두리번거리면서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다. 그는 분명히 시위를 하러 나왔을 것이다. 토요일이니 당연히 시위가 있을 줄 알고 나온 모양이다. 근데 주변에는 등산복 입은 중년의 남자들은 많아도 어디에도 군복 입은 애국 보수 단체 멤버들은 보이지 않는다. 실망스럽고 허탈할 것 같다. 왠지 그 군복이 부끄럼을 타는 듯하다.
애국 보수 단체의 나이든 남자들은 군복을 즐겨 입는다. 그들은 모두 군대를 제대했을까? 군복을 입었다고 그들의 군복무가 증명되는 건 아니다. 분명한 건 그들이 입은 군복이 최신 군복이라는 점이다. 물론 자신이 입었던 그 낡은 군복을 소중하게 간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당연히 사서 입을 수밖에 없다. 요즘 군복 파는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들이 군복을 입는 배경에는 군복무의 신성한 의무를 증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군복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사는 것이다. 군복은 전쟁, 폭력, 군기, 절도, 질서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또한 애국의 의미도 갖고 있다. 그런 군복을 입었을 때 늙고 힘없는 초라한 노인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현역 군인의 충성심으로 충만하게 된다. 군복은 기존 질서 체제와 그 유지의 산물이므로 그것을 깨려 하는 좌파에 대한 저항을 증명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군복은 일종의 무장으로서 ‘늙고 힘없음’이라는 현실을 숨겨준다. 그리하여 군복을 입은 노인은 위협적인 존재가 탈바꿈한다. 이것이 군복의 효과다.
두 번째는 그것이 다 함께 입는 유니폼, 즉 제복이라는 데 있다. 보이스카우트의 유니폼부터 기업의 유니폼, 국가대표의 유니폼, 내가 응원하는 프로 구단의 유니폼에 이르기까지 제복은 늘 소속감과 자긍심을 부여한다. 따라서 제복의 의미는 동질성의 확인이다. 런던 지하철인 언더그라운드의 디자인 사례는 최초의 CI(기업 통합 작업)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20세기 초 영국의 지하철과 버스, 전차는 10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회사들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것이 20여 년에 걸쳐 런던운송회사로 통합됐다. 이때 이 회사의 경영자인 프랭크 픽은 회사 유니폼을 새롭게 제작해 지급했다. 자신이 소속된 회사가 사라지고 새 회사에는 강한 소속감이 없을 때, 이 유니폼은 어수선한 직원들의 마음을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제복의 효과다.
개성을 추구하는 현대의 개인은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눈에 띄는 일이 고통스럽다. 하지만 제복의 경우는 반대다.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있을 때 그들은 고양된다. 그들은 마치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신자들과 같다. 제복의 의미가 동질성의 확인이므로 제복은 함께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다 함께 같은 제복을 입고 있을 때 그들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테스토스테론이 상승한다.
옷은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껍데기다. 하지만 그 껍데기는 내용을 규정한다. 예비역들이 예비군복만 입으면, 그리고 훈련 장소에 다 함께 모이기만 하면, 개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절도 있게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노상방뇨를 하고 훈련소에서는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친다. 평소 점잖던 사람들이 말이다. 예비군복이 자신의 원래 소속, 즉 가족, 직장, 사회로부터 일탈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노인들에게 군복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들의 원래 소속과 처지로부터 벗어나 강력한 힘을 얻는다. 군복이 예비군과 노인들에게 주는 효과는 같지 않지만, 공통된 점은 각자의 개별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어떤 익명성으로 통합되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정류장의 제복 입은 할아버지는 혼자다. 제복의 효과가 반감된다. 함께 할 때의 그 의기양양함은 간데없다. 나는 그 노인의 뒷짐 진 뒷모습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위협적인 시위대의 일원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익명성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존재로 되돌아온 것이다. 아무리 호전적인 무장을 했더라도 동질성을 느끼게 해주는 무리에서 떨어지자 그는 구체적인 개인, 초조함과 외로움을 타는 노인일 뿐이라는 걸 드러냈다.
옷, 형식, 껍데기를 선택하는 행위만큼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다. 옷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옷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결코 그렇지 않다. 첫 번째는 옷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 행위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옷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결국 덜 신경 쓴 ‘옷’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두 번째는 아무리 옷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도 결코 입지 않는 옷이 있다. 그러니까 뭔가를 선택하는 행위보다 선택하지 않은 행위로써 강한 의지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다. 결국 옷이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지 않던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분명한 태도를 표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옷을 입는 순간 그 옷이라는 형식과 껍데기는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사람됨을 만든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옷을 잘 차려 입고 글을 쓴다. 늘 나에 대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체성을 찾는 것, 그것은 과연 진짜 ‘개성’을 발휘하는 일인가? 나만의 고유한 옷 입기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옷 입기의 형식으로 사회가 나눈 어떤 범주에 자신을 집어넣는 행위다. 노인들이 군복 입기를 통해 스스로가 생각하는 애국과 보수의 범주로 자신을 소속시키듯이 말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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