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3. 09:04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The power of voyeurism
n번방 회원들이 디지털 데이터 전문가를 찾아 다니며 그 방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영구적으로 삭제해달라고 요청한다고 한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성착취 영상물을 본다는 게 떳떳한 일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관음증에 탐닉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순간 대단히 수치스럽다. 그것만큼 창피한 일이 어디 있을까? 가족, 친구, 직장동료들 볼면목이 없을 것이다. 그들도 그 정도의 상식이 있다. 그렇다면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볼 여지는 없었을까? 관음증의 대상이 된 그 소녀들 역시 대단히 수치스러울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거기까지 인식이 닿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돈을 내고 그 영상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 그 둘은 ‘권력 관계’로 묶여 있다. 권력자는 늘 다음과 같은 태도를 지닌다. “나는 보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주인이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그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대로 자신의 시선을 즐긴다. 반면에 권력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타인에게 보이는 객체(대상)다.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고 그는 누구도 볼 수 없다. n번방 성착취 영상의 피해자들이 이 경우에 딱 들어 맞는다. 그들은 주체성을 잃었고, 완전히 객체화되었다. 그저 시선의 대상일 뿐이다. 그 상태에서 그들은 더 이상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주체의 시선에 의존해 존재하는 ‘사물’이 된 것이다. 우리가 미술관의 전시품을 볼 때 그것을 사물로 보지 살아 있는 주체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n번방의 익명의 관람자와 적나라하게 자신을 노출시킨 여성들은 이 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 시선은 이처럼 철저한 권력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런 시선의 권력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르는 바로 유럽의 누드화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예술비평가인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누드화는 권력자인 남성과 자신의 벗은 몸을 남성에게 전시하는 여성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시선의 권력자인 남성은 그림에 나타나지 않는다.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림 속의 여성은 화면 밖에 존재하는 어떤 남성의 시선을 의식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인 틴토레토가 그린 <수산나와 장로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 그림은 성경의 <다니엘>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응큼한 늙은 장로 두 명이 젊고 아름다운 수산나가 목욕하고 있는 장면을 훔쳐보다 추행하려는 대목이다. 이 그림에서 오른쪽 위쪽 구석에 두 명의 장로가 목욕하는 수산나를 훔쳐 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산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을 쳐다보고 있다. 이 그림에는 관음증의 시선이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림 속의 장로들이고, 또 하나는 가상의 남성 관객이다. 그 관객은 여인의 벗은 몸을 감상하고 있다. 이때 여인은 사물화된다. 주체성을 잃어버린다. 반면에 유럽 인물화에 등장하는 남성들, 주로 교황, 왕, 귀족들은 대단히 주체적으로 묘사된다. 화가들은 이런 모델은 당당하고 우월한 존재로 묘사해 결코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즉 사물화되지 않도록 한다.
다시 누드화 속의 여성으로 돌아가보자. <수산나와 장로들>은 성경의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그 비중이 높지 않다. 그런데도 굉장히 인기 있는 주제로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화가들이 이 이야기를 즐겨 그렸다. 왜 그런가? 여성의 벗은 몸을 당당하게 볼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점잖지 못하게 왜 여성의 벗은 몸을 보시오?” 이렇게 묻는다면, “그저 성경의 이야기를 보고 있을 뿐이오.” 이렇게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이는 20세기의 잡지 <플레이보이> 전략과 비슷하다. 이 잡지는 매우 지적인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잡지의 발행인 휴 헤프너는 다른 잡지들보다 훨씬 많은 고료를 주고 당대 최고의 문학인, 칼럼니스트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그런데 고급스럽고 지적인 기사 중간 중간에 누드 사진이 있는 것이다. 누드 사진을 볼 수 있는 명분이 있다. 당대 뛰어난 작가들의 통찰력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누드 사진은 덤 같은 것이다.
유럽의 500년 유화 전통에서 누드화는 그런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누드 속 모델은 결코 속되게 그려서는 안 되고 제도권이 인정하는 전통적인 기법에 따라 표현되어야 했다. 비속한 알몸이 되어서는 안 되고 고대 그리스의 비너스 조각처럼 아름답게 승화된 예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아케디미즘, 즉 관학파 예술이라고 부르며, 그 전통은 <플레이보이>의 누드 화보에까지 이어진다. 19세기 관학파의 대표적인 화가인 윌리엄 부게로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과 <플레이보이> 잡지 표지의 포즈는 똑같다. 이처럼 관학파에서 전통이 된 누드화의 형식은 20세기에 들어와 누드사진, 핀업사진, 잡지의 화보, 광고사진 등으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이들 중 몇몇은 예술의 탈을 쓴 채 제작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여전히 관음증의 욕망이 있다. 물론 누드를 그리면서도 모델을 주체로서 당당하게 표현하는 진정한 예술작품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작품은 극히 드물다.
시선의 권력은 20세기에 들어와 기계적인 이미지 재현 방식인 사진의 진보와 함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더욱 폭력적으로 치달아 포르노그래피의 양산을 낳았다. 게다가 디지털 시대가 되어 이미지 소비가 더욱 쉬워지자 관음증에 몰입하는 남성들은 마치 더 강한 마약을 찾는 중독자처럼 더욱 강렬하고 자극적인 이미지를 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동기에서는 과거 유화의 시대와 다르지 않다. 시선으로 자기보다 약한 타자(여성)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그것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의 개선이 없는 한 n번방 같은 악랄한 범죄는 종식시키기 힘들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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