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의 글래머 2020.3

2023. 1. 11. 09:04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Glamor of Hollywood Movies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충격이 하도 강력해서 디자인 칼럼이지만 영화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이 영화는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것으로서 이미 그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아카데미 수상은 작품성 말고 다른 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다. 미국 중심, 영어 중심, 백인 남성 중심의 어워드가 새로운 정기를 맞았다는 식의, 이미 언론에서 밝힌 것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나는 디자인 칼럼니스트로서 디자인, 더 나아가 현대의 생활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영화의 광팬, 이른바 ‘시네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네필이라고 하더라도 1980년대 초에 영화를 볼 수 있는 통로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지금처럼 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자주 극장에 갈 형편도 못 되었다. 인터넷이 있어서 언제든지 보고 싶은 영화를 다운 받아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를 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주말에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걸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주말마다 놓치지 않고 본다면, 최소한 일주일에 두 번 영화를 보는 셈이다. 티브이에서 해주는 영화는 대부분 할리우드 영화였다. 

자주 보지 못하더라도 할리우드 영화가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 시절 나에게 준 영향은 막강한 것이었다. 그것은 대부분 당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문화’였다. 도시와 그 속의 건축물, 집과 사무실의 인테리어, 가구와 식기, 패션과 자동차, 영화에 나오는 모든 것이 훌륭했다. 예를 들어 미국 영화에서 배우들은 늘 거품 목욕을 하고, 목욕이 끝나면 몸을 수건으로 닦는 것이 아니라 타월 가운을 입었다. 어린 나에게 그 모습이 굉장히 고급스러운 문화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당시 내가 살던 집에서는 그런 것을 즐길 만한 물질은 물론 공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는 화면의 색에서부터 질적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한국 문화에 대한 열등 의식을 갖게 되고, 미국 문화에 대해서는 늘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중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초에는 종종 시험이 끝난 뒤 학교가 단체 관람으로 영화를 보여줬다. 그때 봤던 영화 중 하나가 1977년작 <타워링>이다. 낙원상가에 있는 허리우드 극장에서 보았고, 내가 처음 본 재난 영화였다. 70cmm 필름의 스펙터클한 거대 화면에서 벌어지는 화재도 압권이었지만, 특별히 마음을 빼앗겼던 건 인테리어였다. 나는 최근 이 영화를 고화질로 다시 보았는데, 영화 속 인테리어가 1970년대 팝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지 넬슨의 코코넛 의자나 피에르 폴랭의 리본 의자 같은 독특한 형태와 색상을 가진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당시 그런 지식이 전무했던 나로서는 그저 오렌지색의 산뜻한 가구들, 카펫이 깔린 고급스러운 바닥, 커다란 창문, 단순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화려한 것 같은 실내 환경을 보면서 미국 사람들은 저런 건물에서 일하는구나 하고 감탄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골에 살던 사람이 도시를 구경하는 것과 비슷한 문화적 격차의 실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글래머glamour’였다. 글래머는 어떤 매력적인 대상을 보고 그것에 자신을 투사하여 남들의 부러운 시선을 상상하는 것이다. 대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좀처럼 글래머를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권력과 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글래머를 느끼는 대상은 많아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화려한 도시, 건물, 인테리어, 패션, 자동차, 그 모든 것에서 글래머를 느끼고 그것에 대한 강한 욕망이 생긴다. 반면에 현실로 돌아와 내 주변을 보면 보잘것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타워링>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는 늘 그런 글래머를 보여주었다. 미국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매우 한가롭고 여유로운 주택가다. 그곳에는 길 양 옆으로 2층 정도 되는 집들, 저 푸른 초원 위에 있을 거 같은 그런 예쁜 집들이 띄엄띄엄 있고, 집 주변은 모두 잔디가 깔려 있고, 집집마다 커다란 주차장이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세련되고 고급스럽고 풍요로운 것이었다. 영상 속에 비추는 그런 물리적 환경과 문화적 산물들이 나로 하여금 열등감을 갖게 하고 욕망을 불어넣는 글래머였다. 

 

영화 <타워링> 속 현대적인 인테리어. 미국 영화에서 보는 이런 세련된 가구와 디자인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글래머 말고도 매끈하고 또렷한 화질, 생생한 색상,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물 흐르는 듯한 편집, 그 모든 것들이 훌륭했다. 반면에 한국 영화를 보면 카메라가 비추는 집이나 건물, 그 내부는 초라해 보였다. 그것이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면이나 색상은 왜 그렇게 거칠고 칙칙한지. 그뿐만이 아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늘 특정 성우가 더빙을 해서 목소리를 내는데, 한결같이 연극적으로 과장되었다. 대사도 억지스러워 보였다. 가장 보기 괴로웠던 것은 편집이다. 장면과 장면이 개연성 있게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 같은 시간대의 장면인데 낮이 갑자기 한 밤이 돼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편집도 종종 보았다. 마치 그건 영화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려고, ‘이건 영화야’ 하면서 깨어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일 정도였다. 당시 영화 좋아하는 친구들과 만나면 신나게 한국 영화 욕을 했다. 

그러다 나는 성인이 되었고 직장을 다녔고 영화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들었다.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아졌는데, 오히려 영화를 띄엄띄엄 보았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한국 영화가 꽤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학생부군신위>,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들. 어라, 내가 영화에 대한 관심이 멀어진 사이 한국 영화 수준이 꽤 높아졌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먼저 한국의 경제 발전, 영화 제작 시스템의 선진화 같은 것들이 근본적인 동력이었으리라. 여기에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나는 문화적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월간 <디자인> 기자로 입사한 1994년에 나는 비로소 한국의 시각 디자인과 제품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의 현장을 가까이에서 목격했다. 그리고 그 수준이 내가 1980년대 한국 영화에서 보았던 것과는 그 차이가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커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품 디자인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가까워졌고, 그래픽 디자인은 선진국과 이웃 일본 것 따라하기에 바빴던 것에서 벗어나 점차 자기 색깔을 갖기 시작했다. 상업공간의 인테리어는 밝고 미니멀해지고 세련되어졌다. 

 

안상수가 디자인한 <보고서 보고서>. 1980년대 한국의 그래픽 디자인은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그건 내가 과거 중고등학생 때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글래머가 점차 사라졌다는 점이다. 글래머는 기본적으로 ‘아지랑이 효과’다. 즉 열등감으로 인해 우월하다고 여기는 대상을 그저 찬양만 하다 보니 그 대상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현상이다.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자 할리우드 영화 속 디자인이 모두가 다 훌륭한 건 아니라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할리우드 영화에도 키치(싸구려 모방)가 종종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과거 한국 영화의 그 날것 같은 거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리 열등하게 볼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름 아주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꽤 그럴 듯하게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문화적 성숙은 과거 한국의 영화를 재발견할 뿐만 아니라 글래머로 가득하고 좋아 보이기만 했던 할리우드 영화가 겉은 번드르르하고 현란한 액션으로 가득하지만, 그저 평범한 눈요깃거리 영화가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문화적 성숙이란 물리적으로 우리의 생활문화가 풍요로워졌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글래머 현상처럼 한때 열등감을 갖고 우월하다고 여기는 미국과 같은 선진국 문화의 실체를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과시적이고 속물적인 문화의 정신적 빈곤을 깨닫는 것이다.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극장에서 보면서 느꼈다. 이제 화려한 글래머의 유혹에 더 이상 주눅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초라한 현실이라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뛰어난 영화적 표현이라는 것을 그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은 그러한 문화적 성숙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