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1. 12:55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Function is subject to a form
루이스 설리번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말은 모 더니즘을 대변하는 가장 유명한 명제다. 의자는 사람의 엉덩이를 받칠 수 있는 평평한 좌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적당한 높이에 좌석을 고정시키려면 다리가 필요하다. 다리가 좌석을 안정적으로 받치려면 최소한 3개가 있어야 한다. 그렇 게 스툴이 탄생한 것이다. 다리 세 개를 가진 스툴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를 잘 실현시키고 있다.
친구들과 산행을 할 때면 늘 목격하는 장면이 있다. 산에 올라가다 보면 어디에 서나 평평하고 넓은 바위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넓고 평평한 바위가 길목 에 나타나면 여지없이 가방과 장비를 내려놓고 엉덩이를 바위 위에 주저앉히는 것이다.<사진 1> 그 행위는 의식적이라기보다 무의식에 가깝다. 내 육체가 힘든 상태에서 앉기 좋은 돌이 나타나자 돌이 나의 육체로 하여금 쉬는 행동을 취하게 한 것이다. 이것을 ‘행동유도성(affordance)’이라고 말한다. 평평한 사물은 그 위에 뭔가를 올려놓거나 앉도록 유도한다.
산에서는 그렇게 행동을 부르는 사물을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나무로 만든 사인 물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사진 2> 이 사인물은 나무 중간에 걸려 있다. 못으 로 박아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나무의 잘린 가지 위에 살짝 걸쳐 놓았다. 잘려나 간 나뭇가지가 사람으로 하여금 사물을 걸쳐 놓는 행동을 부른 것이다. 계곡물이 흐르는 산의 초입에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드넓게 펼쳐 있다. 이 바위 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새긴 이름으로 가득하다.<사진 3> 평평하고 단단한 바위는 그 위에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긴 것이다. 산을 다 내려오니 나무 막대기가 가로등 기둥에 기대 있는 것이 보인다.<사진 4> 누군가가 산중에 서 지팡이 대용으로 사용하다 산행이 끝난 뒤 쓸모가 없어져 버린 것으로 보인 다. 이것을 사용한 사람은, 약간 휘어지긴 했지만 1미터가 조금 넘는 나무 막대기 에서 지팡이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형태가 기능을 따르기 이전에 형태에서 기능을 발견하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왜 형태가 기능을 따르기 이전에 기능 적 형태를 발견하는 일이 먼저일까? 초기 인류에게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기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산을 오르는 사람 이 지팡이가 없다고 해서 산속에서 지팡이를 만들어낼 수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 지로 다리에 힘이 빠졌다고 의자를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러니 임시변통으로 필 요한 기능을 할 수 있는 대용품을 ‘발견’하는 일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
초기 인류는 칼 같은 도구를 만드는 것에 앞서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돌을 발 견했을 것이다.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돌이 인류 최초의 돌칼이 되었을 것이 다. 따라서 기능은 형태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기능은 형태 속에서 그 잠재적 가능성을 숨긴 채 있다. 특정한 형태에서 기능을 발견하는 일이 인류가 한 최초 의 창의적 디자인이 아니었을까? 인류는 보잘것없는 기술력이 생기자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돌을 만들기로 한다. 대체로 평평한 돌을 가져와 다른 돌로 깨뜨 려가면서 날카로운 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 시점부터 형태는 기능을 따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해 보면 형태가 기능을 따르려면 ‘기술 력’을 갖고 그렇게 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 제는 좀 더 앞선 문명에서 가능한 일이다. 인류는 기술력에 더해 조직화의 능력 까지 갖춘 뒤 단순한 칼은 물론 우주선까지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출발은 대단히 미약해 보이는 ‘기능적 형태의 발견’에 있다.
이러한 인류 최초의 창의적인 디자인, 즉 기능적 발견은 고도로 발전한 문명세계 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이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사례에서도 밝혔지만, 산이 아 닌 곳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느 잡지사의 미팅룸에 갔더니 넓은 나무 판자가 바닥에 놓여 있다.<사진 5> 판자 위에는 ‘밟지 마세요’라는 문장을 프린 트한 종이가 놓여 있다. 아마도 그 위에 올라간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람 은 어린아이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은 재료나 높이가 다른 사물을 보면 무의식 적으로 위로 올라가 밟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카페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카 페로 들어오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플라스틱 구조물에 뚫린 구멍 속에 우산 손잡 이를 집어넣는다.<사진 6> 플라스틱 구조물은 우산 꽂이가 아니라 다른 용도의 물건이었다. 손에 우산이 들려 있었고 그것을 안정적으로 놓아둘 곳을 찾았는데, 마침 구멍이 있는 플라스틱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적당한 크기로 뚫린 구멍에 서 기능을 발견한 것이다. 이 경우 아이들이 재료와 높이가 다른 나무판자 위에 올라가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과는 다른 기능적 발견이 보인다. 그것은 심란함 과 절박함이다. 마음속에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심란함과 절박함이 있다. 그런 불만족스러운 마음이 무언가를 찾게 만든다. 절박하게 찾는 사람은 다른 사 람보다 사물에 숨어 있는 잠재적 기능을 발견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어느 빌라의 입구에 우편함 기능과 함께 디지털 도어록 시스템이 갖춰진 금속 구 조물이 있다.<사진 7> 이곳에 사는 사람이 식물 기르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모 양이다. 그 위를 알뜰하게 식물 화분 받침대로 사용하고 있다. 화분 놓을 장소를 찾고자 하는 그 절박함에 응답해 사물은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알려주었다. 현대 인은 누구나 “기능은 형태를 따른다”는 명제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고도로 발전한 문명세계지만, 어떤 면에서 원시 인류의 창의성은 여전히 실천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다. “기능은 형태를 따른다”는 “형태를 기능을 따른다”에 앞선 삶의 진리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 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 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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