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31. 09:45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⑲ Toward a Space of Coexistence, Getting Rid of Prejudices
지하철역을 나서니, 낯선 말이 먼저 들려온다. 곳곳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 말이 이어진다. 사회집단을 드러내는 관습 체계가 언어인 만큼 이질적 사회집단 공간에 들어섰음을 청각이 먼저 반응해 인지한다.
대로에서 꺾어 들어 시장통에 이르자, 몇 걸음 만에 확연한 차이가 눈에 잡힌다.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서 차이나타운 한가운데임을 실감한다. 즐비한 간체자 간판이 이 공간을 웅변하고 있다. 냄새와 공기부터 다르다. 웅성거리는 말소리만큼이나 음식도 이국적이다. 그들 특유의 향이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국 특유의 풍토와 문화, 전통이 대림동 길거리에서 짙은 향으로 조리되고 있었다.
길가 좁은 골목마다 구인 알림판이 서 있다. 일할 장소와 일당, 비자 요건이 빽빽하다. 작업 기간은 며칠에서 한 달 남짓까지 각양각색이다. 이 공간 속 조선족 동포와 화교가 살아내는 삶의 단면이, 구인 알림판 작은 글씨로 줄줄이 열 지어 서 있었다. 이들은 누구이며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차이나타운
쿨리(Coolie)였다. 반노예적 삶을 살았던 중국인으로, 이들이 임오군란(1882) 때 인천에 주둔한 자국 군대 뒷바라지를 위해 한반도에 처음 발 딛는다. 2년 후 제물포에 약 1만 3,220제곱미터(4천여 평) 조계지를 설치한 게 한반도 차이나타운 모태다. 화교는 특유의 장사수완과 근면함으로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막강한 경제력을 구축한다.
이들이 곤궁에 처한 건 정작 해방 이후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무역이 끊기고, 이주 억제로 인구가 정체한다. 한국전쟁 중 이승만은 정책으로 화교를 공공연히 차별했다. ‘창고봉쇄령’으로 화교 무역상이 타격을 입는다. 중국 음식점에 차별적 세율을 적용하고, 음식값 인상을 통제했다.
박정희는 더 가혹했다. 1961년의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은 전적으로 화교를 겨냥한 법이었다. 화교는 정부 승인을 얻어야만 토지 소유가 가능했다. 1970년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에 따라 1가구 1주택에 1점포만 허용되고 주택은 약 661제곱미터(200평) 이하, 점포는 165제곱미터(50평) 이하로 제한받았다. 논밭이나 임야 취득은 불가능했으며 소유한 토지와 건물은 임대차할 수조차 없었다.
외국인 거류 제도에 의해서도 고통받는다. 영주권 제도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화교는 ‘외국인 출입국관리법’을 따라야 했다. 거주자와 비거주자로 분류되어, 거주자는 2년마다 비자를 받아야만 했다. 음식업에서도 제한과 차별이 이어졌다.
이를 견디지 못한 수많은 화교가 미국, 호주, 대만 등지로 떠나버려 인구가 급감한다. 1970년대 중국 음식점이 1/4로 감소한다. 한때 10만여 명이던 화교가 1970년대 후반 2만여 명으로 줄어든다. 세계적 냉전체제 속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는 화교에겐 숙명적 족쇄였다. 중화민국을 조국으로 내세워야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냉전이 해체되는 1990년대 초까지 화교의 삶은 어둡고 추운 응달이었다.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가 전환점이다. 조선족 동포와 결혼 등 간헐적 교류에서 외환위기를 겪고 1990년대 말 취해진 유화적 태도와 정책으로 화교 유입이 급증한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무역량의 폭발적인 증가가 주요 요인이었다.
공단 벌집에서
화교 유입 본격화로 도시공간도 변화를 맞는다. 구로공단이 남동, 반월, 시화공단으로 대거 이전하자 노동자 숙소였던 ‘벌집’이 텅텅 빈다. 이 공간을 조선족 동포가 채우고 뒤이어 화교가 스며든다. 값싼 임대료 때문이다. 가리봉동과 구로동, 대림동 등 지하철 7호선을 따라 넓은 지역을 망라했다.
주변 재래시장으로 화교 상인이 파고든다. 가격경쟁력을 갖춘 중국산 물품이 보따리상을 통해 대거 유입된다. 공산품은 물론 농수산물까지 전방위적이다. 대표적 사례로 가리봉시장 주변이 이들의 터전으로 변한다. 축소판 중국이 시장은 물론 주변 곳곳으로 스며든다. 식품, 의류, 잡화와 음식점을 가리지 않는다. 이주해 온 중국인을 주 고객으로 삼은 환전소와 국제전화가 가능한 전화방, 체류 관련 행정사무소 등 특이한 기능도 함께다. 가리봉시장과 우마길은 지금 ‘옌벤 거리’라는 진한 흔적으로 남겨져 있다.
도시적 삶은 지대(rent)에 좌우된다. 이는 어느 경제체제에서건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화폐로 치환된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주택은 주거 양태에 따라 지대가 변한다. 구로공단 제조업이 성업할 당시 이곳 지대는 벌집이 좌우했다. 산업구조가 급변한 일시적 공백기에, 그 공간을 조선족 동포와 화교가 채워낸 셈이다.
구로가 디지털산업단지로 변모한 2천년대, 조선족 동포와 화교가 차지한 공간도 변화를 맞는다. 벌집이 아파트단지나 4∼5층 다세대로 바뀐 것이다. 주거 양태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는 조선족 동포나 화교에게 큰 부담이었다. 공간 천이가 뒤를 잇는다.
가리봉동 등에서 이주가 일어난다. 상대적으로 개발이 미흡해 지대가 싼 대림2동으로 몰려드는 역설로 이어진다. 이로써 2천년대 후반 대림동에 하나의 배타적 공간이 형성된다. 가리봉시장과 함께 화교가 자리 잡은 대림중앙시장이 그 중심이다.
확산하는 공간
차이나타운은 변화하는 중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다소 감소세가 역력했으나, 일시적이었다. 중국이 빗장을 풀면서 엄청난 이동과 교역이 다시 불붙고 있다. 미국의 노골적인 간섭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대림중앙시장을 중심으로 확산 중인 차이나타운은 따라서 그 세력이 더 넓어지고 강해질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차이나타운은 비교적 균질한 토지이용을 보인다. 생산에 기반을 둔 공간이 아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창고로부터 들여온 온갖 물품을 취급하는 특성을 보이며, 한국인 상점과 보완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생필품은 한국인 상점에 의존한다. 그들의 특색을 가장 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음식과 술집이 다수를 차지한다. 음식이 문화를 나타내는 즉자적 상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 생활양식과 특색이 가미된 소비 기능이 공간을 구성한다.
따라서 배타적이다. 이는 간판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한자를 번체자로 배운 세대도 간체자 간판은 쉬이 판독해 내기 어렵다. 한글로 부기한 내용도 불친절(?)하다. 진열대나 사진을 유심히 살펴야 뭘 취급하는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는 차이나타운의 세계적 특성이기도 하다. 문자나 언어는 타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방인으로서, 정체성을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한 공간에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대를 이어 생을 영위해야 한다면, 당연한 현상이다.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화교 최전선으로 인정해야 한다.
중국인 디아스포라다. 이들이 남서울 취약한 도시공간에서 자생했다. 이곳에서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개연성은 농후하다. 도시정책을 뛰어넘어, 더 자라날 공간 특성을 얼마나 너그러이 포용해내는가로 귀결될 것이다. 그게 공간의 온전한 변천을 담보하는 첩경이다. 한발 더 나아가 차이나타운의 특성을 남서울 명소로 키워갈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지혜가 필요하다. 같이 살아간다는 건 그런 일이다.
버려야 할 편견
20세기 말까지 우린 중국을 얕잡아보는 경향이 강했다. 지금은 어떤가? 예전 중국을 보듯 이곳을 바라보는 시선엔 아직도 편견이 가득하다. 거기에 차별도 가해진다. 폭력이다. 그들과 문화는 물론 인식과 철학도 다르다. 서로의 ‘다름’에 우린 무척 인색하다. 다름을 인정하며 공존하는 지혜를 발휘할 순 없을까?
대림동 차이나타운을 소재로 그려낸 영화나 드라마 속 모습은 대체로 살벌하고 어둡다. 범죄조직 온상처럼 그리는 게 다반사다. 예전 전라도 출신에게 덧씌워지던 편견이 조선족 동포나 중국인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표현의 자유를 탓하는 게 아니다.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 조직을 바라보는 시선을 말하는 거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범죄가 있는가? 그렇다 해도 이곳 역시 사람 사는 공간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몇 년 전 통계는 오히려 이곳 중대범죄 비율이 서울 다른 곳보다 낮은 수치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차이나타운은 동남아시아와 유럽, 미국 등 세계 유수 도시에 존재한다. 150여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 시간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초기의 극심한 차별을 이겨내고 LA 차이나타운 등 몇몇은 수많은 관광객이 쇼핑과 문화를 즐기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중국 전통문화는 물론 동서양이 융합된 특이한 문명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스스로 일궈낸 대림동 차이나타운은 우리 안에 스며든 작은 중국이다. 여느 차이나타운처럼 솟을삼문이 없어도 좋다. 그 힘으로 공존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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