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 그레이 청담범용성과 익명성, 적절한 변별성의 균형 2024.9

2024. 9. 30. 10:40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e Criticism _ Gray Chungdam Balance of universality, anonymity, and appropriate distinction

 

 

 

 

 

서울의 강남은 첨예한 자본의 대립과 여러 가지 문화가 혼재되어 폭발하는 용광로 같은 도시이다. 이러한 도시에서의 건축 행위는 맥락과 배경을 충분히 이해한 후에 집행돼야 하고, 이 과정에서 효율성, 수익성, 기능성, 심미성, 그리고 변별성까지 고려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해당 대지는 10차선 도로에서 한 골목 뒤에 위치해 전면으로는 10층 이상의 큰 건물들에 막혀 있고, 6미터의 넓지 않은 도로와 여러 종류의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레이 청담’의 용도는 임대용 상업건물이다. 어떤 임차인이 건물을 사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설계자가 고려해야 할 사항은 범용성과 익명성, 그리고 적절한 변별성이다. 건물이 너무 개성이 두드러지거나 너무 평범하다면 임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김영수 건축사는 효과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격자(LATTICE)라는 아주 평범한 조형과, 계단참을 원형으로 만들어 얻은 강한 조형을 조합했다. 2층부터 시작되는 격자 형태의 콘크리트 입면은 도로 면에서 뒤로 물러나 있으며, 1층은 통유리로 개방되어 거리에 상응한다. 1층 기단의 조형은 T자 형상으로 마치 상부의 격자가 하나로 모여 지면과 만나는 듯하다. 가장 먼저 인지하게 되는 부분은 분절된 각각의 요소들(격자 입면, T 형태의 기단, 곡면을 가진 계단실)이 하나의 입면으로 구성을 이루는 것이다. 전면도로 쪽이 좁고 뒤로 길어지는 L자 형상의 대지 모양대로 전용공간이 구성되어 있고, 동쪽인 측면으로 길게 코어가 조성됐다.

그레이 청담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 중 하나는 건물의 곳곳에 삽입된 테라스들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2층 전면의 테라스 이외에도 모든 층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외부와 연계한다. 마치 허파와 같이 숨을 쉴 수 있는 기능과 입면에도 다채로움을 더한다. 특히 6층에서 외부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보는 5층 테라스는 비슷한 높이의 주변 건물의 옥탑과 겹쳐 마치 드넓은 건물 숲의 바다에 착륙하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내부로 들어가 보면, 보조 공간(SERVANT SPACE)과 주 공간(SERVED SPACE)이 명쾌하게 구분돼 있고, 벽체의 마감으로도 구조와 비내력벽이 나누어진다. 요즈음 임대공간에는 천장 마감을 하지 않고 보와 슬라브를 드러내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창호와 상부 슬라브가 만나는 구간이나, 단열재 등으로 가려야 할 부분을 정교하게 분리하는 ‘정통적인 마감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디테일의 표현도 무척 세심하게 이루어졌다. 선 홈통은 그 기능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투박하게 노출되거나, 감추기에 급급하기 마련이다. 김영수 건축사는 입면의 격자 패턴과 모듈에 상응해 홈통을 배치하여, 도드라지지 않고 입면의 일부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 T자로 모이는 기둥 안쪽을 오목하게 만들고 선 홈통을 끼워 넣어 정교해 보이고, 관리를 용이하게 만드는 세심함을 보여준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임대용 근린생활시설 건물에서 배치와 코어의 위치를 정해 최대의 면적과 효율을 얻고 나면 남는 것은 구조의 명료함과 기능, 외부 입면 디자인, 디테일의 처리 등이다. 김영수 건축사는 구조와 비구조의 축열 사이에서 질서를 정립하고 그것을 입면 디자인에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기둥과 내력벽의 혼재, 코어의 외부 노출로 인한 구조의 불명료함 때문에 이 방법론은 힘을 잃고 말았다. 주 입면의 콘크리트 격자 틀은 실제 구조와는 거의 연관이 없으며, 그 육중함과 깊이로 인해 자칫 주변 거리에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읽힐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재료의 물성과 벽체의 깊이로 인해 외부에서는 깊은 그림자를 얻게 되어 선이 굵은 느낌을 전달한다. 반면, 내부에서는 자연광을 걸러주어 산란광에 가까운 부드러운 질감의 채광을 얻게 된다. 김영수 건축사는 구조적 명쾌함과 주변 맥락과의 상응을 포기하고, 더 내재적인 건축의 특징(빛의 사용, 볼드한 입면으로 인한 변별성)을 얻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을 충족하는 건축이란 존재하지 않고, 설계자는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 미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임대건물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결국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것에 더 방점을 두는지가 중요하다 하겠다. 격자 프레임은 정체성을 확립하고 내부 공간의 분위기를 만드는 주 요소지만, 건물에서 가장 사족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 되었다. 1층 기단부의 단순한 형태와 구조와 연계해 구조적 명쾌함을 더 유도하고 더 가볍고 투명한 재료 등으로(완전히 현재 안과 상반되는) 정리했다면 불특정 다수를 위한 임대건물의 용도와는 더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쓰임새와 사용자가 뚜렷하게 정해져 있는 건물이 아닌, 임대용 건물을 설계하는데 저명한 건축사를 고용하고 큰 비용을 투자하는 모습에 회의적인 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다. 혹자는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보이는 양상이며, 소위 건축 선진국에서는 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건축 설계는 용도와 사용자를 넘어 많은 경우의 수를 재단하고, 더 나은 해결 방법과 사용법을 제안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사는 동시대의 건축은 더 까다롭고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야 하기에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글. 민우식  Min, Woosik 건축비평가

 

 

민우식 건축비평가

 

크랜브룩 예술 아카데미 건축석사, (주)민워크샵 건축사사무소
좋은 건축은 직관과 보편적 해결방법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라고 믿는다.  공간의 밀도가 높은 주택에서 깊이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자연광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은 디테일을 완성도 있게 만드는 것 등에 관심이 많다.

nuno112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