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31. 09:30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⑤ Seoul's first residential-commercial complex facing a crisis
서울 도심 한가운데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차단벽 같은 거대 건물군이 있다. 8개 건물을 통칭하는 ‘세운상가’다. 이중 현대상가는 녹지 축 조성계획에 따라 2009년 헐렸다. 낡고 쇠락해 이제 노년에 접어든 이 집들을 희롱이라도 하듯, 세운상가 주변은 온통 공사판이다. 쿵쾅거리는 공사 소음에 ‘역시 서울!’이라는 자조적 현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거대한 소음에, 이곳 역시 아득한 시공간으로 파묻혀 사라지는 중임을 실감한다.
그러함에도 이곳엔 아직 소리가 살아있다. 상인들의 외침과 오밀조밀한 작업장이 만들어 내는 소리다. 소리가 살아있다 함은, 공간의 고유 생태기능이 그나마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소리는 이곳을 되살리려는 의지이거나 기어코 지켜내겠다는 몸부림처럼 들려왔다.
위협받는 공간
세운상가와 주변은 무척 독특한 기능을 발휘하는 공간이다. 고도로 숙련된 기술자들이 소규모 제조업체를 꾸리고 있다. 서로 계열을 이뤄 “마음만 먹으면 미사일도 만들어 낸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할 만큼 도심 제조업의 메카를 이룬 곳이다. 업종 간 관계망이 촘촘하게 작동하는 하나의 ‘생태계’다. 이런 기능 간 친연성이 이곳의 사회·경제 및 물리적 토대로, 세운상가가 펼친 품 안에서 경이롭고 활기찬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고도로 숙련된 기술자들이 나이 들어가고 있다. 이를 이으려는 젊은 세대는 드물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누군가는 세운상가의 토양이 오염되었다고 여기는 듯하다. 더럽고 비좁으며, 낡고 비전 없어 보이는 작업장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늙은 노동자들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이곳을 방문해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 토로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시선일까. 아니길 바라지만, 현실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2006년 그는 세운상가를 포함한 지역 일대를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하면서, 2015년까지 세운상가를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물론 생존권에 위협을 느낀 상인들 반대가 극심했다. 종묘∼남산을 잇는 녹지 축 조성을 내세웠으나, 실제는 주변을 전부 철거하고 초고층빌딩을 건립하는 철거재개발이 주목적이었다. 격한 심정을 토로하는 태도로 보아 그의 생각은 아직도 확고한 듯 보인다. 긴 안목으로, 정녕 뒷세대의 지혜와 기술력에 이 땅과 공간을 맡겨둘 순 없을까?
그저 빨리빨리
파리 외곽에 라데팡스라는 복합지구가 있다. 1958년 구상하여 30여 년 동안 순차적으로 개발을 완료한 지구다. 철저한 보차분리 원칙에 따라 조성된 20세기 도시계획의 모범으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다.
라데팡스가 구상되어 실행된 지 10년 후, 서울에 세운상가가 생겨난다. 뭐든 군대식으로 밀어붙인 불도저 서울시장의 작품이다. 종묘∼대한극장 앞까지 폭 50미터의 약 1킬로미터 구간에 거대 건물군이 잇닿아 들어선 것이다. 준공까지 2년이면 족했다. 역사 도시 서울의 시간으론 찰나에 불과했다. 라데팡스의 10분의 1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이 땅은 미군 공습을 두려워한 일제가 1945년 조성한 소개공지(疏開空地)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 땅을 무허가 판자촌이 점령한다. 슬럼화한 사창가와 전쟁 이재민, 농촌에서 상경한 사람들이다. 이승만 정권 당시, 지금의 종묘공원에 국회의사당을 짓자는 논의가 일어 상징 가로로 예정된 이 땅이 존치되는 행운을 얻는다.
5·16쿠데타 후 당시 재무부는 이 땅을 무단점유자에게 불하하고, 서울시는 도시계획도로로 지정한다. 1966년 시장이 된 김현옥이, 박정희에게서 이 땅을 개발해 보라는 내락을 얻어 즉각 개발에 착수한다. 설계는 번갯불에 콩을 볶고 철거는 회유와 반협박으로 전광석화다.
서울시 의뢰를 받은 김수근 사단이 설계를 맡는다. 재촉하는 발주자 탓에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하다. 프랑스 마르세유에 ‘수직 도시’를 적용한 르 꼬르뷔지에의 집합주택 위니떼 다비따시옹에서 층별 기능 분리와 근린주구를 참고하고, 1952년 영국 스미스 부부가 주창한 다층도시의 ‘공중 가로’에서 보차분리 개념을 빌려온다. 이 둘을 혼용해 세운상가 설계가 마련된다. 스케치 수준으로 완료된 이 설계가 걸작인지를 떠나 부지 형상에 맞는 깊은 고려가 있었는지의 문제와, 짧은 시간에 이뤄진 설계이다 보니 모방에 가까웠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아울러 차단벽을 방불하는 이 집합건축물이 향후 주변은 물론 도시공간구조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란 예측 역시 부족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저 모든 게 속전속결이었다. 차단벽처럼 들어선 긴 건물군에 당시 조급성이 그대로 투영되어 보인다.
1960년대에 기형적으로 시작된 도시화는 이렇듯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시민의 삶과 안전보다 눈에 거슬리는 불결함과 슬럼을 쓸어내기 바빴다. 장기적 안목에서 긴 시간을 두고 변화하는 도시공간구조를 파악할 여유와 마음가짐은 물론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최고 권력자의 시선이 두려웠고, 외국인이 바라보는 풍경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이후 서울은 ‘빨리빨리’로 점철되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확산하고 재구조화되었다. 야만의 세월이었다. 굴곡진 삶들이 왜곡된 근대화 깃발에 속절없이 매몰되고 말았다.
설계를 마쳤으나, 공사가 문제였다. 당시로선 신개념인 개발사업이다. 단순 도급이 아니라, 사업시행자가 투자한 비용을 분양 등으로 회수하는 방식이다. 불확실한 사업성에 건물을 짓겠다는 업체가 없었다. 반강제로 8개 사업시행자가 선정된다. 불확실한 사업성은 당연히 용적률 상향으로 이어졌다. 구상설계에 적용된 개념마저 파괴되고 모호하게 변질해 버린 요인이었다. 수익성이라는 민간 논리에 매몰되어 버린 탓이다. 보차분리와 중정, 인공대지를 두어 각 건물군에 동사무소, 파출소, 학교 및 근린생활시설을 설치해 완벽한 정주체계를 갖추겠다는 수직 도시 구상이 사라진다. 이상적 설계라 제시된 내용마저 무참히 깨져버렸다.
변천과 개발압력
세운상가는 특이한 변이과정을 거쳤다. 한때 최고급이었던 아파트는 강남개발과 고급맨션 등장으로 하향여과(상류층이 좋은 집으로 이사하면 아래 계층이 그 집을 점유) 과정을 거쳤다. 이젠 기능마저 바뀌어 상가 사무실이나 창고로 사용 중이다. 1960년대 말 이곳 소매상가는 서울 시내 백화점을 능가하는 경쟁력이 있었다. 1970∼80년대에는 발전하는 전기·전자 업종의 호황으로 전국을 호령하는 곳이기도 했다. 1987년 들어선 용산전자상가에 1차 타격을 입고, 2008년 청계천 복원에 따라 주변 제조업 생태계가 붕괴하면서 문정동 가든 파이브로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둘 다 정부가 입힌 타격이었다.
이후 영세한 가내수공업형 제조업과 상점들로 상가가 채워진다. 이런 측면에서 세운상가는 한마디로 ‘정부 주도의 산업·상업형 젠트리피케이션에 철퇴를 맞은 곳’이라 할만하다.
준공 10년이 지날 무렵부터 세운상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건설 당시 환호성을 울리며 찬양하던 것과는 정반대 현상이다. 심미안이 높아졌을까? 의식 수준에 혁명적인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건물이 아름답지 못하고 궁궐과 남산을 잇는, 일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녹지 축을 단절시켰으며, 그나마 보차분리가 파괴되었다는 비판이었다.
세운상가를 포함한 주변이 1979∼88년 사이 재개발지구로 지정된다. 1995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세운상가 건물군이 자리한 폭 50미터, 길이 1킬로미터 국공유지를 ‘공원·녹지’로 지정한다. 세운상가 철거가 전제된 종묘∼남산을 잇는 녹지 축으로, 그 실현 가능성을 떠나 확고한 법·제도적 지위를 확보한 셈이다.
이후 세운상가를 포함한 주변 재개발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나 성사되진 못했다. 넓은 지역에 분포한 소규모 필지와 수많은 소유권자로 합의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4년 박원순 시장은 세운상가와 주변 상인의 의견수렴 및 국내외 연구 결과 등을 종합해, 철거보다는 재사용이라는 ‘보존형 개발’로 선회한다. 이에 따라 세운상가 리모델링이 2017년 완료되어, 빌 게이츠를 꿈꾸는 청년 창업·벤처기업이 입주하였다. 그러함에도 주변 지역은 중소규모 재개발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도심 생산생태계와 초고층 빌딩군의 가치 우위를 판명할 능력이 내겐 없다. 다만 뒷세대로 이어질 생산생태계의 가치와 공간에 끼칠 영향력을 가늠할 수는 있다. 한번 지워지면 영영 회생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생산생태계를 지워버린 왕십리뉴타운 사례에서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아파하지 않았던가?
글.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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