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4. 09:08ㆍ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Messenger
요즈음은 메시지(message) 전성시대인 것 같다. 더구나 성큼 다가온 정치의 계절을 맞아 유력 정치인들이 생산해 내는 메시지는 한층 더 요란해졌다. 한때는 파란 머플러를 휘날리며 “새빨간 거짓말”을 힘주어 외치던 이가 있었는가 하면, 또 빨간 넥타이로 남다른 ‘정열’을 강조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빈 손바닥에 근대 이전의 유물인 ‘왕(王)’을 새겨놓고 주술처럼 펴 보이며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속으라는 얘기인지, 웃으라는 얘기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를 보통 메신저(messenger)라고 한다. 군대에서는 이를 전령(傳令)이라고도 부른다. 고대의 전령은 우선 잘 뛰어야만 했다. 사실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도,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를 격퇴한 그리스의 승전보를 고국에 전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달리고 또 달린, 어느 한 전령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메신저도 역사의 발전과 함께 진화를 거듭해왔다. 구릿빛 건각(健脚)을 자랑하는 인간의 두 다리로만 땀을 뻘뻘 흘리며 뛰다가, 이내 곧 말(馬)을 타고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땅 위에서 뛰고 달리는 것만으로 그친 게 아니었다. 하늘로도 치솟아 올랐다. 그렇게 메신저는 때로 전서구(傳書鳩)로 대체되기도 했고, 또 때로는 개(犬)와 파발마(擺撥馬)를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오랜 중세의 암흑을 털고, 사회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비약을 이뤄내던 근대산업사회 초기, 바야흐로 메신저에도 동력이 탑재되기 시작하였다. 그 덕분에 전보와 전화, 그리고 무전(무선전신)이 속속 우리 곁으로 날아들었다. 그 메신저가 최근에는 우리 주변의 인터넷까지 파고들었다. 이제는 굳이 뛰고 달리거나, 말과 개와 비둘기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메신저도 원시반본(原始反本)하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사력을 다해 땅 위에서 뛰고 달리다가 마침내 하늘로 비상(飛翔)까지 했던 메신저가, 어느 날부턴가 다시 또 서로 뒤질세라 땅 위를 휙휙 내달리고 있는 걸 흔히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핸들 커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도로를 바람처럼 질주하고 있는 저 오토바이 퀵서비스가 그렇고, 또 로켓배송을 한다며 밤새 노동자를 속도 경쟁으로 내몰아야만 하는 택배 서비스가 그렇다. 모두 다, 저 먼 마라톤 평원에서 장장 42.195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려와 결국 생명을 소진했다는 어느 한 전령의 후예들인지는 까마득하게 잊은 채 속도 경쟁에만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랑스러운 월계관도 없고, 전승(戰勝)의 소식을 하루빨리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모든 메시지는 그렇게 신속해야만 하는 것일까? 늦어도 좋은 소식, 반가운 소식, 희망의 메시지는 없을까?
아주 먼 옛날에도 메시지를 수령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고대 사회의 티를 벗지 못했던 삼한(三韓)에서는 그 신성불가침의 지역을 ‘소도(蘇塗)’라 지칭하고, 거기에서 하늘의 계시를 받고자 했다. 그 전달 매개체가 이른바 ‘솟대’였다. 저 먼 하늘로부터 부여받고 싶은 메시지를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鳥)가 대신 전달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다란 장대 끝에 새를 정성스레 새겨서 소도(蘇塗)에 드높이 꽂아놓은 것이다.
단지 솟대뿐만이 아니다. 하늘의 메시지에 대한 경외는 실로 대단했던 것 같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의 거주처였던 한옥의 지붕에서도, 그 흔적은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기와지붕 여기저기에 용(龍)과 봉황과 독수리를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보통 기와지붕에는 마치 용의 비늘과 같이 빛나는 암키와를 겹겹이 잇고 깔아서 지붕면을 만든 뒤, 그 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 용마루를 꾸미게 된다. 상상의 동물인 용(龍)도 높고 거룩한 존재로 인식되곤 했는데, 거기에 또 지엄한 왕의 묘호(廟號)에나 겨우 붙일 수 있는 ‘마루(宗)’라는 호칭까지 붙여놨으니, 이를 어찌 가벼이 볼 수 있으랴?
그렇게 용마루는 기와지붕에서도 아주 거룩한 존재였다.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과 소통할 수 있었기에, 남다른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또 그 용마루의 좌우 양 끝에는 보란 듯이 망와(望瓦)를 설치해 놓았다. 아니, 옛날에는 지금의 저 망와로는 성이 차지 않았었나 보다. 고대의 지붕 용마루에는 거의 다 치미(鴟尾)가 내려앉아 있었다.
치미는 봉황의 ‘치켜 뜬 꼬리’를 상징화한 것인데, 이는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메시지의 수신처라는 얘기가 된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리고 있는 치미를 볼 수 있었고, 마침내 경주 황룡사지에서 직접 출토된 치미까지 보게 되었다.
이러한 치미도 세월의 파고(波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지, 고려시대 중기부터 점차 용의 머리를 상징하는 ‘용두(龍頭)’와 독수리의 머리를 본뜬 ‘취두(鷲頭)’로 바뀌게 된다. 어디 그뿐이랴. 일반 민가로 내려오면 지금 우리가 기와지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망와의 형태로 바뀐 채, 간신히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망와가 그렇게 높은 족속(族屬)이었다는 전설은 일단 제쳐두고라도, 망와의 표정은 보면 볼수록 재미난다. 왕방울만 한 두 눈을 한껏 부라리고, 뭉툭한 코를 벌름거리며, 이빨까지 드러낸 도깨비가 이미 사라진 제 위엄을 지켜낸답시고 용쓰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무섭게 찡그렸으니 더 이상 근접하지 말라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머지않아 닥칠 세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찬바람 세찬 기와지붕 위에서 악귀를 물리친답시고 저렇게 사시사철 용트림을 하고 있는 저 망와가, 우리 조상들이 한옥 지붕에 창출해놓은 또 하나의 메신저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게 흔히 일컬어지는 벽사(辟邪)의 메시지인지, 우리들의 고단한 일상에 던지는 해학(諧謔)의 메시지인지 그건 분명하지 않더라도,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해서 요란하게 등장했다가 쉬이 사라지고 마는 ‘파란 머플러’나 ‘빨간 넥타이’, 그리고 ‘빈 손바닥’하고는 아예 근본부터 다른 존재였다.
수천 년 동안 면면히 이어 내려온 한결같은 메신저(messenger). 그것은 그 흔한 세 치 혀나 빈 손바닥 하나 갖추지 못한 채, 우리 한옥의 지붕에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글. 최상철 Choi Sangcheol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최상철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 건축사
최상철은 전북대학교 건축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 고, 현재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대표건축사로 활동하고 있 다. 그 동안의 건축설계 작업과정에서 현대건축의 병리현상 에 주목하고, 산 따라 물 따라 다니며 체득한 풍수지리 등의 ‘온새미 사상’과 문화재 실측설계 현장에서 마주친 수많은 과 거와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살터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 면서, ‘건축’에 담겨있는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기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저서로는 ‘내가 살던 집 그곳에서 만난 사랑’, ‘전주한옥마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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