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화면 전성시대 2021.10

2023. 2. 10. 09:07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The good days of small screens

 

몇 달 전부터 넷플릭스에 가입해 영상을 보고 있다. 새로운 정보의 문이 열리면서 한동안은 넷플릭스에 푹 빠져 살았다.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 <옥자>도 봤고, <나의 문어 선생님>이라는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도 보았다. 예전에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봤는데, 요즘에는 넷플릭스 앱을 먼저 실행할 때도 많다. 유튜브를 보든, 넷플릭스를 보든 커다란 컴퓨터 모니터나 TV로 보기보다는 조그마한 스마트폰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아니 왜 답답하게 굳이 그 조그만 디스플레이로 보려고 하는 걸까? 아마도 접근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인의 몸에 거의 24시간 붙어있는 스마트폰을 켜는 것이 TV를 켜는 것보다 훨씬 손쉬운 일이다. 상품 가격은 싸지만 멀리 있는 마트보다 조금 비싸더라도 가까운 편의점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스마트폰의 장점은 음식을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이동 수단 안에서도, 심지어는 운동을 하거나 걸을 때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현대인은 커다란 화면보다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TV의 크기는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 사람들이 더 큰 화면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많은 시간을 조그만 화면에 집중하면서 보내고 있다. 화면 크기의 차이는 전달되는 정보의 차이를 만든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TV로 보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압도적인 크기와 사운드 때문만은 아니다. 큰 화면을 볼 때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 때 제작진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배우뿐만 아니라 무대 장치에도 각별한 신경을 쓴다. 방을 하나 연출하더라도 그 안에 들어가는 가구는 물론 아주 작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의미를 고민한다. 그 장면이 불과 몇 초만 나오더라도 말이다. 요즘에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수준이 높아져서 더욱 화면 구석구석을 보는 것 같다. 그런 점을 고려해 제작진은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영화의 배경을 연출한다. 
롤랑 바르트의 책 <카메라 루시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흑인들은 영화를 보아도 마을의 넓은 광장의 한구석을 지나가는 작은 암탉만을 볼 뿐.” 이것은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한 것이다. 영화 문법에 익숙하지 않았을 아프리카 사람들이 커다란 화면에서 관심을 가졌던 건 배우가 아니라 우연히 카메라에 포착된 배경 속의 닭이었다. 그마저도 한쪽 구석에 겨우 잡힌 작은 암탉이다. 그 암탉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얼마나 무료했을까? 나는 요즘 유튜브의 한국고전영화 채널을 즐겨 보는데, 1950~1980년대 영화들을 볼 때 영화의 내용보다 과거 서울의 거리와 건물, 자동차와 간판을 보는 게 더 흥미로울 때가 많다. 

롤랑 바르트는 그의 유명한 사진 개념 ‘푼크툼(punctum)’을 설명하려고 암탉 이야기를 했다. 푼크툼은 사진을 찍은 이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을 관객이 읽어내는 경험을 말한다. 의도하지 않은 것이므로 푼크툼은 대개 사진의 주제 너머에 있다. 사진작가가 통제하지 못한 우연한 것, 하찮은 것이다. 한 가족이 인왕산 정상에 올라갔다. 아버지가 가족사진을 찍는데, 같은 시간 정상에 올라온 등반객들이 우연히 사진 배경에 찍힐 수밖에 없다. 배경에 나오는 모든 정보를 아버지가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러다 보면 사진 찍을 때는 몰랐던 여러 가지 요소들이 사진 속에 기계적으로 담기게 된다. 그 사진을 본 누군가는 사진을 찍은 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배경에서 자신의 관심을 끄는 걸 발견할 수도 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1966년작 영화 <욕망(Blow up)>에서 주인공인 사진작가는 공원에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어떤 연인을 찍는다. 스튜디오로 돌아와 사진을 인화하는 과정에서 그는 연인과 함께 찍힌 공원 풀숲 속에서 그들을 겨누고 있는 총구를 발견한다. 우연히 찍힌 총구는 그를 자극한다. 

스마트폰 거치대는 자동차 같은 이동 수단은 물론 주방가구, 침대헤드 등에 붙여 놓음으로써 언제, 어디, 어떤 자세로든 스마트폰을 볼 수 있도록 한다.
루이스 하인의 <허약한 아이들>에서 작가는 아이들의 기형적 모습을 느끼도록 의도했지만, 롤랑 바르트는 이 사진에서 작가의 의도를 넘어선 여자아이의 손가락을 감고 있는 붕대에 관심이 간다고 말한다


특정한 이미지를 보는 관객의 관심은 분산될 수밖에 없다. 사진작가 또는 영화감독이 아무리 관객의 마음을 이끌고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사진을 보든 영화를 보든 어떤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이렇듯 누군가로부터 통제받지 않는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이 될 때 풍요로워진다. 그런 풍부한 경험은 정보의 질이 아닌 양에 달려 있다. 커다란 화면이 주는 이익이 바로 이것이다. 극장에서 볼 때보다 TV로 볼 때 영화 정보의 양은 줄어든다. TV로 볼 때보다 스마트폰으로 볼 때 정보의 양이 더욱 대폭 줄어든다. 어떤 영화를 스마트폰으로 먼저 보고 나중에 커다란 모니터로 다시 봤을 때 그 영화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볼 때는 영화 제작진이 공들여 준비한 다양한 정보들이 눈에 들어오기 힘들다. 작은 화면으로 본 영화는 시간적으로 편집된 영상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편집에 따라 수많은 영상과 음성 정보가 사라지듯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보는 것은 많은 정보를 잃어버린 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어떤 흥미로운 관심거리를 발견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이런 현상을 나는 ‘다이제스트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잡지가 잘 팔렸다. 이 잡지는 제목 그대로 이 세상의 온갖 정보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미디어가 발전하자 문자와 이미지로 기록되는 정보가 넘쳐나게 되었다. 세계가 좁아져 사람들이 교양으로 쌓아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아졌다. 이 잡지는 장편소설은 물론 흥미로운 기사도 요약해줌으로써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잡지의 인기에 대해 미국의 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은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독자들이 더 원하는 것은 이제 원본이 아니라 다이제스트 자체가 되었다. 형체가 아니라 형체의 그림자가 본질이 되고 있다.” 

한때 전 세계에서 2천만 부 이상이 팔렸던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이제 인기가 예전 같지 않지만, 그것을 대체한 미디어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유튜브일 것이다. 유튜브는 다이제스트 정보의 천국이다. 각종 책과 영화 등을 요약해 주는 채널이 무수히 많다. 물론 이런 정보가 많아진 것도 정보의 풍요로움이라고 할 만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정보의 풍요로움이 더욱더 정보의 축약을 추구하도록 만든다. 현대인은 알고 싶고, 알아야만 하는 정보가 그 어느 시대보다 넘쳐난다. 정보 과잉 시대여서 뭘 모른다고 하는 게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요즘 뜨는 메타버스, 클라우드 같은 기술 관련 개념은 왠지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럴 때 다이제스트 정보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게다가 축약 정보는 더 재미있고 효율적이다. 이런 시대에 <전쟁과 평화> 같은 장편소설을 누가 읽을 수 있을까? 이렇게 빠르고 재미있는 정보가 대세이다 보니 영화도 잠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소설이나 영화 같은 콘텐츠를 축약해서 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다이제스트 정보에서 중요한 건 가장 흥미로운 대목과 결과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대사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세상에 대한 묘사 하나하나가 사실성을 갖도록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거쳐 정성 들여 이야기를 구축한다. 그래야 그 이야기가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고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가상의 이야기와 이미지는 그것을 감상하는 동안만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전제되어야 재미도 있고 감동도 오는 것이다. 사실상 이야기의 큰 줄기나 결말보다, 주변과 과정에 대한 상세하고 치열한 묘사야말로 핵심 콘텐츠다. 그런 디테일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풍요로운 감상이다. 작은 화면 속 다이제스트 체험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정보 소비는 가난해진다. 정보 과잉과 미디어의 극단적 발전이 낳은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