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6. 09:07ㆍ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One who banishes himself out of boundaries
중국 당나라 시대의 문장가인 유종원(773-819)이 쓴 글 중 재인전(梓人傳)은 대목장인 양잠(楊潜)의 직무에 대한 태도를 그린 내용인데, 재인은 오늘날의 건축설계하는 이와 같다. 이 글에 따르면, 그가 사는 집은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일을 시작할 때면 도면을 현장의 벽에 붙여놓고 여러 직공들을 불러모아 명확하게 임무를 부여하고 조정하며 질책을 한다. 그는 모든 재료와 공법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으며 일이 끝나고 집이 완성되면 대들보에 자기의 이름만을 새겨 남긴다. 혹시 일하는 도중에 건축주가 틀린 지시를 하면 그 부당함을 말하고 해소 되지 않으면 즉시 그 일에서 손을 떼고 유유히 떠난다. 공공적 프로젝트를 할 때는 임금을 덜 받고 봉사하는 그를 들어 유종원은 일국의 재상의 태도가 이와 같아야 한다고 했다.
아, 1천2백 년 전의 건축사도 이랬는데 나는 어떻게 건축사로서 삶을 살고 있을까. 아래는 내가 쓴 책 ‘보이지 않은 건축, 움직이는 도시(돌베개 간)’에서 기술한 내용 중 일부를 편집한 내용이다.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
“지식인은 경계 밖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추방해야 하는 자이다… 그는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 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며…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이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을 통하여 서양이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적 편견을 날카롭게 비판한 지식인이었던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그가 1993년 BBC 방송의 리스강좌에서 강의한 내용들을 모아서 ‘Representations of Intellectuals’이란 제목으로 출간한 책(한국어 번역본 ‘권력과 지성인’ 1996)의 이 문장들을 읽는 순간, 나는 그때 김수근 건축이라는 견고한 영역에서 이탈하여 내 건축의 정체성을 찾아 검은 밤바다의 선원처럼 분투하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어서 기댈 곳을 찾아 이 집단 저 부류의 세계들을 연신 기웃거리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내 초라한 행색을 준열하게 꾸짖는 듯한 이 글로 나는 궤멸 당하는 듯 전율했다.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라니…
건축사는 자기 집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집을 지어주는 일을 고유직능으로 가진다. 그 직능은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사색과 성찰을 수반함으로 이뤄지는 일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타자화시키고 객관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컨대 건축사가 설계작업에서 거의 첫 번째 그리는 도면인 평면도는 집을 중간 높이에서 수평면으로 잘라서 보는 그림인데, 이 그림의 실체를 보기 위해서는 시점을 무한대의 높이로 올려야 한다. 무려 신적 위치에 도달해야 하는 일이니, 이는 남이 사는 모습을 객관적 위치에서 보며 그 사는 방법을 조직하는 일이 평면도를 그리는 일이라는 뜻이어서, 이 도면을 그리게 되는 건축사는 스스로를 세상의 경계 밖으로 내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건축사의 직능이란 게 항상 새로운 상황과 만나면서 시작되는 일이다. 새로운 건축주와 만나고, 새롭게 삶을 시작하게 되는 사용자와 만나며, 새 땅과 만난다. 그런데, 여기에 그냥 자기가 가지고 있는 타성과 관습의 도구를 꺼내어 종래의 삶을 재현시킨다? 이건 건축이 아니다. 그냥 관성적 제품이며, 그래서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소망을 배반하는 일이 되며, 어쩌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땅을 범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 건축사는 늘 새로움에 반응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밖에 없으니, 경계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 소임을 파기하는 일과 같다.
자발적 추방자의 삶, 물론 건축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좀 더 밝게 진보시킨 모든 이들의 일관된 삶의 태도였다. 예컨대 예수가 대표적이다. 스스로를 광야로 추방하여 유대교의 관습을 비판하고 로마총독의 권위를 따르지 아니했으며 소외된 자들과 약한 자들을 껴안고 사랑과 평화를 전하다가 모든 이들이 메시아로 추앙할 때, 다시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아 불멸의 고독으로 추방하고 말았다.
석가모니도 마찬가지였다. 왕궁 밖의 자발적 추방자가 되어 제도적 욕망에 묶여 있는 이들을 향해 스스로 번뇌를 끊으라고 했다. 해탈이란 그렇게 추방되어 얻게 되는 자유일 게다. 수 없이 많다. 우리를 진보시키고 우리의 삶을 속박에서 자유하게 한 이들 모두가 그런 우직한 삶의 태도를 갈망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그런 이들은 늘 확신에 차 있었을까?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1961년 파리의 오데옹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의 무대 풍경은 지금에도 이 연극이 공연될 때마다 모방되는 디자인이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초라한 의자가 전부인 이 가난한 풍경은 조각가 자코메티의 작업이었다. 베케트와 자코메티, 이 위대한 두 작가가 가진 창작의 근원을 비교하며 쓴 책 ‘dialogue in the void(공허 속에서의 대화; 1992 마티 메지드)’에서는,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강박관념을 적시하고 이들 작업의 바탕은 ‘불안’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다른 어느 누구도 마지막 결정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이들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늘 번민하고 주저한 끝에 결국은 자포자기하여 만들어진 게 그들의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코메티의 조각은 늘 비어있고 시시때때로 거리로 나와 그 비워진 부분을 거리의 풍경이 채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조성된 팽팽한 긴장이 강력한 힘을 분출시킨다.
그렇다. 나에게 설계를 맡기면 좋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듯 설명하는 나지만, 사실 자코메티와 베케트의 불안이 나의 내면에도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내가 잘못 판단하여 선을 잘 못 그어서 그 속에 거주하게 되는 이들이 나쁜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내가 건축을 아니함만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 늘 초조하고 불안한 것이다. 그 까닭일까? 대개 건축하는 이들은 늘 소심하고 주저한다. 마감시간에 쫓기며 밤새우는 일을 밥 먹듯 하는 게 그 증좌다. 그래서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기댈 집단과 제도를 기웃거리고 한 패가 되는 일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한다면, 그렇게 되면 그 건축사는 고유의 직능을 포기하는 일과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나는 못한다.
건축은 우리의 삶을 이루게 하는 직접적이고 적극적 수단이니 건축설계는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건축설계를 하는 이는 인간의 생명과 그 존엄에 대해 스스로 진실하고 엄정해야 하므로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며 의에 주려야 한다. 특히 다른 이들의 삶에 관한 일이니 온유해야 하고 긍휼해야 하며 청결해야 하고 화평케 해야 한다. 바른 건축을 하기 위해 권력이나 자본이 펴놓은 넓은 문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스스로를 깨끗게 하여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아야 하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일을 거부해야 한다. 모든 사물에 정통하고 박학하기 위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 결단코 불의와 화평하지 않아야 하며, 때로는 그런 행동 때문에 집이나 고향에서도 비난 받을 각오가 되어야 한다. 사람 사는 일을 알기 위해 더불어 먹고 마셔야 하지만 결코 그 둘레에 갇혀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수시로 밖으로 추방하여, 광야에 홀로 서서 세상을 직시하는 성찰적 삶을 지켜야 한다. 오로지 진리를 따르며 그 안에서 자유하는 자, 그가 바른 건축사가 된다. 그러니 바른 건축사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이다. 당연히 내게는 언감생심의 길이며 그 흉내조차 내지 못하면서도 건축사라고 칭하며 사는 일이, 나는 늘 두렵고 아프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혁신을 일으킨 스티브 잡스. 그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행한 연설의 한 문장은 그가 일군 업적만큼 강렬했다. ‘우직하라, 그리고 갈망하라(stay foolish, stay hungry).’ 그는 그렇게 살았다. 그의 말을 이렇게 바꿔도 될까? ‘stay out, stay alone.’ 바깥에서 머무르며 홀로 됨을 즐기는 삶, 이게 진정한 지식인의 태도며 적어도 바른 건축사가 사는 방법일 게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 다시 이렇게 설명했다. “지식인은… 단도직입적이다. 그러한 말들로 인해 높은 지위의 친구를 사귈 수도 없고, 공적인 영예를 얻지도 못하는 부득이한 현실로부터 전혀 탈출할 수도 없다. 그것은 고독한 상황이다.”
…그렇게 되면, “깊은 겨울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에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는 때”일지도 모른다. 그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라고 하이데커가 말했던가…
글. 승효상 Seung H-Sang (주)종합건축사사무소 이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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