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7. 09:06ㆍ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A Cozy Place
0. 나는 뒤척인다. 베개와 함께. 그것으로 되었다.
1. 책 따위를 만드는 일로 입에 풀칠하며 근 20년이다. 책을 만들수록 책과 멀어지는 것은 대형 횟집의 직원 식사가 주로 김치찌개나 매운 라면인 것과 비슷한 이치이지 싶다. 그런 중에도 내가 가끔 몰래 꺼내 보는 책이 하나 있다. 「건축가 없는 건축」. 아무 곳이나 펴도 상관없고, 거꾸로 읽어도 상관없으며, 사진 한 장만 오래 쳐다보다 책을 닫아도 전혀 서운 하지 않다. 이 책에 실린, 아프리카 기니의 장정 넷이 머리에 한 모서리씩 지붕을 이고 있 는 사진의 제목은 <기니의 이삿날>이다.
2. 군 제대와 동시에 지금까지 나는 월세 세입자이지만, 그 한참 전인 열 살부터 열세 살까지 나는 건물주였다. 뻔한 스토리이다. 서울 변두리 산골에서 자란 나는 뒷산 중턱 커다란 소 나무 위에 집을 지었다. 시행은 내가, 설계와 시공도 내가, 감리는 충직한 검둥이와 누렁 이가 했다. 비탈에 매달린 아름드리 앉은뱅이 소나무는 키를 키우는 대신 몸집을 불린 상 태였다. 나는 굵은 가지 위에 2인치 각목과 4인치 각목 몇 개를 얽고 사방에서 자라던 노 간주나무를 잘라다 바닥을 만들었다. 내가 눕고 개 두 마리가 누워도 자리가 조금 남았다. 가로를 지탱하는 것은 세로이다. 간단한 이치다. 세로 없는 가로에는 머리를 뉘일 수 없 다. 만취한 자이거나 깨지 않을 잠에 든 자를 제외하고는. 심지어 바람도 가끔은 벽 뒤에 숨는다.
3. 청승맞게도, 새소리에 낮잠을 깨고, 눈동자 위로 눈송이가 떨어지며, 바 람 불면 창이고 바람 멎으면 벽이었던 공중 저택을 가졌던 나는,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평균 4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 었다. 지정학적으로 일별하자면 북한산 북쪽 자락에서 시작해 서쪽 능 선을 끼고 돌아 남쪽을 거쳐 이제는 약간 남동쪽으로 이동해 있다. 숙명 이고 순차적이라면 아마 다음은 정릉쯤이 될 것이지만, 최근엔 경남 양 산에서 한 2년 살기도 했으니, 지정학 운운은 과하지 싶다. 다행히 좋은 집주인들을 만난 덕에 월세살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늘 눈물이 났다. 이사 하는 날이면 나는 짐을 내보내고 내가 살았던 곳을 구석구석 쓸고 닦고 화장실 청소에 창틀 청소까지 마친 뒤, 문 앞에 선다. 그냥 습관 같 은 것이다. 텅 빈 곳, 짐을 빼서 낯설지만 전혀 낯설 수는 없는 공간을 향 해 마지막으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눈물이 난다. 몇 년간 점유하며 뒹굴고 비비적거리며 시연한 온갖 추태 를 이곳은 기억한다. 그뿐이랴. 저 가로와 세로로 이뤄진 구석구석이야 말로 내 낮과 밤의 진정한 버팀목이었음을. 이별은 늘 아프다
4. 건물주는 소유하고 세입자는 점유한다. 그럴까. 공간은 소유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점유했던 자의 기억으로만 창조되는 무정형의 그림자와 같다. 공간의 진정한 주인은 세입자다. 아니다. 공간의 진정한 주인은 공간 자신이며, 낮과 별과 해와 바람과 비가 저 창에서 이 창으로 움직 일 때 그 안을 빙글빙글 돌았던 삶의 단면들의 총합이다. 그러나 그 단 면들은 너무나 빠르게 사라지기에 사람들은 관청의 서류 한 장에 그토 록 목을 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간 소유의 끝판왕이었던 파라오는 불 멸을 간절히 소망하며 황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웠다. 다른 한 편으로 예수는 파묘(破墓)했다. 무덤 하나를 깨서 수십만 개의 기념관을 가졌 으니, 남는 장사였다. 유한한 인간에게 공간이 부동산이 되는 것은 죽음 이후이다. 살아 움직이는 동안 모든 부동산은 동산이다. 창밖에서 울어 대는 새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곳은 전적으로 나를 향한 공간이며, 바로 그곳은 나의 뒤척임을 전제로 늘 재창조되는 공간 이기 때문이다. 빛바래가는 벽지와 더불어
글. 최하연 Choi, Hayun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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