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저작물과 저작자의 성명표시권 미디어 속 건축사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여정 2025.12

2025. 12. 31. 10:25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al Works and Author’s Right of Attribution
A Journey to Reclaim Architects' Names in the Media

 

 

 

1. 들어가며
최근 몇 년간 방송가와 출판계 등에서는 ‘집’과 ‘공간’을 주제로 한 콘텐츠가 대거 등장하고 있다. 시청자나 독자들은 TV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의 독특한 건축물을 편리하게 접하고, 잡지나 유튜브를 통해 멋진 공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콘텐츠의 향연 속에서 정작 중요한 창작자의 이름이 누락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바로 그 공간을 창조해 낸 ‘건축사’이다. 음악을 소개할 때 작곡가와 작사가를, 미술 작품을 논할 때 화가를, 서적을 논할 때 저자를 명시하는 것은 오늘날에 와서는 매우 일반적인 관행이자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유독 건축물에 대해서는 ‘멋진 집’ 내지는 ‘독특한 건물’ 등으로만 매체에 소개될 뿐, 창작의 주체인 건축사의 이름은 방송 크레디트나 기사 본문 등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는 단순히 업계의 관행이나 아쉬움의 차원을 넘어서는 중대한 문제이다. 바로 창작자의 가장 기본적인 인격적 권리라고 할 수 있는 ‘성명표시권’ 침해와도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건축물이 저작권법상 어떻게 ‘저작물’로서 보호받고 있으며, 건축사가 창작자로서 가지는 ‘성명표시권’의 법적 근거가 무엇인지 명확히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법원의 주요 판례를 통해 이러한 권리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분석하고, 건축사들이 실무에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방안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건축물은 ‘저작물’인가?
(1) 저작권법상 ‘건축저작물’의 정의
저작권법은 제4조 제1항 제5호에서 “건축물·건축을 위한 모형 및 설계도서 그 밖의 건축저작물”을 저작물의 예시로서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이는 건축물 그 자체는 물론, 건축을 위한 모형과 설계도서까지도 독립적인 저작물로서 보호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물론 모든 건축물이 저작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저작물로 보호받기 위한 핵심 요건은 ‘창작성’이다. 여기서 창작성이란 고도의 예술성이나 독창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창조적 개성이 드러나는 수준, 즉 “남의 것을 베끼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것이면 충분하다.


(2) 기능성과 창작성의 구분
건축물은 미적 표현 외에 ‘기능성’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동시에 가지는 이중적 특성이 있다. 따라서 법원은 건축저작물의 창작성을 판단할 때, 해당 건축 분야의 일반적인 표현 방법, 용도나 기능 자체, 이용자의 편의성 등에 따라 표현이 제한된 경우를 제외하고, “사상이나 감정에 대한 창작자 자신의 독자적인 표현을 담고 있어 창작자의 창조적 개성이 나타나 있는 경우”에 창작성을 인정한다(대법원 2020. 4. 29. 선고 2019도9601 판결 등 참조). 예를 들어, 아파트의 일반적인 평면설계도에 포함된 설계상의 특징들의 경우 아파트 내부 공간 활용의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한 공간 및 요소들의 배치 및 구성에 관련된 것으로 기능적 요소라 할 것이어서 창작성을 인정받기 어려울 수가 있다(서울고등법원 2004. 9. 22.자 2004라312 결정). 하지만 건물의 독특한 외관 디자인, 비정형적 공간의 구성, 전체적인 미적 조합 등에서 건축사의 창조적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다면 이는 건축저작물로서 저작권법에 따른 보호를 받게 된다.


(3) 건축사법상 서명날인 vs 저작권법상 성명표시
여기서 많은 건축사들이 혼동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바로 ‘건축사법’ 제21조에 따른 설계도서등의 서명날인 의무와 ‘저작권법’상의 성명표시권이다. 건축사법상의 서명날인은 건축물의 안전과 품질을 보장하고 행정적·기술적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한 ‘공법상의 의무’이다. 반면, 저작권법상의 성명표시권은 창작자로서의 인격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사권(私權)’이다. 즉, 건축사는 설계도서에 서명날인할 의무를 지는 동시에, 자신이 창작한 저작물(건축물, 설계도서 등)에 자신의 이름을 표시할 ‘권리’를 가진다. 이 두 가지는 목적과 성격이 전혀 다른 별개의 사안이다.


3. 저작인격권과 ‘성명표시권’(저작권법 제12조)
저작권은 크게 ‘저작재산권’과 ‘저작인격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저작인격권은 저작자가 자신의 저작물에 대해 가지는 인격적, 정신적 이익을 보호하는 권리로서,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상속할 수 없는 일신전속적인 권리이다. 이러한 저작인격권은 다시 공표권(저작물을 공개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할 권리), 동일성유지권(저작물의 내용 및 형식 등을 함부로 변경하지 못하도록 할 권리), 그리고 ‘성명표시권’으로 구성된다.
저작권법 제12조(성명표시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① 저작자는 저작물의 원본이나 그 복제물에 또는 저작물의 공표 매체에 그의 실명 또는 이명을 표시할 권리를 가진다. ② 저작물을 이용하는 자는 그 저작자의 특별한 의사표시가 없는 때에는 저작자가 그의 실명 또는 이명을 표시한 바에 따라 이를 표시하여야 한다. 다만, 저작물의 성질이나 그 이용의 목적 및 형태 등에 비추어 부득이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이 조항은 건축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첫째, 제1항에 따라서 건축사는 자신이 설계한 ‘원본’인 건축물, 설계도서 등이나 그 ‘복제물’ 또는 저작물의 ‘공표 매체’, 즉 방송 프로그램, 신문, 잡지, 웹사이트 등에 자신의 실명 또는 이명을 표시할 적극적인 ‘권리’를 가진다(단순한 선전광고물에 성명표시를 하지 않은 것은 성명표시권의 침해 행위로 보기 어려울 수 있다).
둘째, 제2항에 따라 건축물을 ‘이용하는 자’(건축주, 시공사, 방송사, 언론사 등)는 건축사의 특별한 의사표시(이름을 삭제하거나 변경해 달라는 요청 등)가 없는 한, 건축사가 표시한 대로 그 이름을 ‘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방송 프로그램 말미에 건축사의 이름을 누락하거나 잡지 기사에서 설계자를 언급하지 않는 행위는 바로 이 제12조 제2항의 의무를 위반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물론 ‘부득이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는 예외 조항이 있지만, 방송 프로그램의 엔딩 크레디트나 잡지의 지면에 이름 한 줄을 넣는 것을 ‘부득이한’ 경우라고 해석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는 타 예술 분야(음악, 미술, 사진 등)에서는 저작자 표기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4. 건축물에 대한 성명표시권을 인정한 주요 판례
저작권법상의 성명표시권은 단순한 선언적 권리가 아니다. 법원은 실제 분쟁에서 건축물에 대한 성명표시권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으며, 이를 침해한 경우에 대해서는 별도의 손해배상까지도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1) ‘삼각형 펜션’ 사건
(서울중앙지방법원 2013. 9. 6. 선고 2013가합23179 판결)
독특한 삼각형 형태의 펜션을 설계·시공한 원고는, 피고가 이를 모방하여 유사한 펜션을 건축하는 한편 해당 건축물에 원고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다. 법원은 사안에서 펜션의 독특한 외관에 창작성을 인정하여 복제권(저작재산권) 침해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해당 건축물에 원고의 성명을 표시하지 않아 성명표시권(저작인격권)도 침해했다고 명시적으로 판시하였다. 이는 건축물 자체에 대한 성명표시권 침해를 인정한 초기 사례로서 의미가 크다.


(2) ‘웨이브온 카페’ 사건
(서울서부지방법원 2023. 9. 14. 선고 2019가합41266)
부산의 유명 카페 ‘웨이브온’의 디자인을 무단 복제하여 울산에 유사한 카페를 건축한 사안에서, 법원은 국내 최초로 침해 건축물의 철거를 명령하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손해배상액 산정에 관한 부분이다. 법원은 복제권(저작재산권)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4,500만 원과는 별개로, 성명표시권(저작인격권) 침해로 인한 정신적 손해에 대해 500만 원의 배상금을 추가로 인정했다. 이는 건축저작물 침해에 있어 성명표시권이 단순히 부수적인 권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보호의 대상이 되는 중대한 인격적 권리임을 법원이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판례들은 건축물의 창작성이 인정되는 한, 건축사의 성명표시권은 법적으로 강력하게 보호받는 권리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5. 권리 행사에 있어서의 현실적인 문제
법원의 전향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앞서 언급했듯, 유수의 프로그램에서 건축사의 이름은 영상 말미 자막이나 엔딩 크레디트에서 생략되거나 유튜브 영상의 설명란에서도 누락되기 일쑤이다. 이는 미디어 업계가 건축물을 저작물이 아닌 부동산이나 상품으로만 인식하는 관행에서 비롯된다. 방송의 초점은 그 집에 사는 건축주의 이야기나 시공사의 기술력에 맞춰질 뿐이고, 그 공간을 창조한 건축사의 창작 과정에서의 고민과 철학은 종종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작곡가나 작사가의 크레디트를 누락하면 즉각적으로 저작권 침해 논란이 발생하는 반면, 건축과 관련된 콘텐츠에서 건축사의 크레디트가 누락되는 것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해 저작권법 제12조 제2항 위반의 문제가 될 수 있고 바로잡아야 할 관행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6. 결론 및 제언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법언이 있다. 법원의 판결과 법 조항이 건축사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그 권리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은 결국 건축사 본인의 적극적인 노력에 달려있다. 기존의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권리자들의 보다 적극적인 대응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할 것인바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수단을 고려할 수가 있을 것이다.


(1) 계약을 통한 사전 분쟁 예방
- 저작권 귀속 조항 명시 : 설계 계약서에 “본 설계의 저작권(저작인격권 및 저작재산권)은 건축사 OOO에게 귀속된다”는 조항을 명시하되, 기본 설계비용 등에 저작권 양도 비용은 포함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 성명표시 의무 조항 신설 : “건축주는 완공된 건축물의 식별 가능한 위치(예: 명판 설치) 및 해당 건축물을 주요 소재로 한 각종 콘텐츠(인쇄물, 온라인 게시물 등)에는 ‘설계: OOO 건축사사무소 OOO’와 같이 설계자를 명확히 표기하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의무 조항을 삽입한다.
- 2차적 활용 시의 사전 동의: 해당 건축물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건축주의 미디어 촬영 및 콘텐츠 제작 시에는, 사전에 건축사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저작자(건축사)의 성명표시를 조건으로 하도록 한다.


(2) 건축물 이용에 대한 사후 관리 및 대응
- 표준 크레디트 방식 제시 : 해당 건축물을 주된 소재로 한 콘텐츠의 제작을 위하여 방송사나 언론사 등에서 촬영 요청이 올 경우, 촬영 동의서와 함께 저작자 표기를 위한 일종의 ‘표준 크레디트 가이드’를 공문 등 형태로 제공한다.
- 정기적인 모니터링 및 대응 : 본인의 작품이 노출된 미디어를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필요시 방송사나 언론사 등에 정정 및 재발 방지를 요청하거나 공동의 대응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 저작권 등록 : 창작과 동시에 권리는 발생하지만, 혹시 모를 분쟁을 대비하여 주요 건축물에 대해서는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저작권 등록을 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등록 시 추정력·대항력 등의 법적 효력이 발생하여 관련 분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건축사의 성명표시권은 단순히 이름을 알리기 위한, 명예욕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창작자로서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그 창작물에 대한 인격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본질적이고 법적인 ‘권리’이다.
‘웨이브온 카페’ 사건의 철거 명령은 건축물에 대해 부여될 수 있는 저작권이라는 권리가 더 이상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중대한 권리임을 사회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건축사의 ‘성명표시권’ 또한 타 예술 분야와 동등하게 존중받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할 때이다. 건축이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 한 시대의 ‘문화’로 기록되길 바란다면, 그 문화의 창조자인 건축사의 이름부터 올바르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글. 박정훈 Park Jeonghun
한국저작권위원회 법제연구팀 선임연구원

 

 

박정훈 선임연구위원·한국저작권위원회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를 수료하였다. 2017년부터 한국저작권위원회 법제연구팀에서 근무하며 저작권 법제도 개선 및 정책 지원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최근의 주요 연구 실적으로는 「공동저작물 규정의 입법 개선방안 연구」, 「밈(meme) 현상 확산에 따른 저작권 쟁점 연구」(공저), 「생성형 AI 저작권 안내서」(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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