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 없는 기술과 재료의 시대 2025.12

2025. 12. 31. 10:15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An Era of Resistance-Free Technology and Materials

 

 

<사진 1> 올도완 돌칼, 170만년 전 ⓒ Didier Descouens

우리는 저항 없는 기술과 재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는 뭔가를 만들려면 늘 재료의 강력한 저항에 시달려 왔다. 인류의 역사는 이 저항하는 재료를 통제하는 기술을 진화시켜 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도구를 만든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60만 년 전이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올도완(Oldowan) 석기는 돌로 돌을 깨뜨려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든 인류 초기의 돌칼이다.<사진 1> 이것을 만든 인류를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손재주 있는 인간’이다. 호모 하빌리스가 만든 돌칼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투박한 돌 덩어리처럼 보인다. 현대인이 호모 하빌리스가 만든 돌칼을 본다면 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돌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투박한 돌칼은 우주선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첨단 기술로 가는 첫 도약이었다.

<사진 2> 돌니 베스토니카 비너스, 기원전 29,000-25,000년 ⓒ che


돌칼에 이어 두 번째 기술도약이 있었다. 그것을 바로 점토의 발견이다. 현대인은 구석기시대 호모 사피엔스가 만든 돌니 베스토니카(Dolni Věstonica) 비너스를 본다면 이것은 분명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확신할 것이다.<사진 2> 비너스 조각은 자연의 보편적인 돌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인공물이다. 어떤 계기로 인류는 기존의 돌칼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기술의 도약을 할 수 있었을까? 딱딱한 돌이 아닌 ‘점토’라는 새로운 재료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강이나 호수, 늪지와 같은 물가에 있는 흙을 채취했다. 점토는 작은 알갱이로 구성된 흙으로서 물로 반죽하면 부드럽고 잘 뭉쳐지고 불로 구우면 딱딱해진다. 다시 말해 인류가 뭔가를 만들려고 할 때 재료가 저항을 덜한다는 뜻이다. 딱딱한 돌보다 훨씬 쉽게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저항이 적은 재료를 다루자 그릇과 같은 유용한 도구는 물론 쓸모없는 것, 즉 예술 행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에서 예술로 진화하는 도약의 결정적 열쇠는 저항이 적은 재료를 찾은 것이다.


손의 솜씨 역시도 재료를 통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무 이르게 되고, 정밀하고 교묘하게 재료를 다룬다. 이런 과정에서 인류는 다양한 도구를 발전시켜 더욱 재료의 저항을 꺾어왔다. 예를 들어 나무를 다룰 때는 톱, 대패, 끌, 줄, 자, 망치 같은 도구로 재료를 능수능란하게 요리한다. 그렇게 장인들은 도구와 숙련된 기술로 재료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인류는 불과 그릇을 이용할 줄 알게 된 뒤 딱딱한 곡물을 부드러운 죽으로 만들어 쉽게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돌, 금속, 나무와 같은, 사람의 통제에 저항하는 힘이 강한 재료들을 도구와 손의 솜씨로 조금씩 정복해 나갔다.

<사진 3> 런던 대박람회에 출품된 지나치게 장식적인 제조품, 1851년


19세기 산업혁명이 이뤄지면서 또 한 번의 커다란 기술적 진보를 이루게 된다. 기계를 이용해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주조(casting), 프레스 머신, 선반이나 밀링 머신과 같은 정밀 공작기계가 그것이다. 기계 기술의 등장으로 재료를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게 되자 나타난 뜻밖의 현상은 싸구려 모조품의 양산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중산층이 증가했다. 재산이 많아진 중산층은 귀족들이 쓰는 물건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졌다. 이것을 간파한 공장주들은 생산성이 좋아진 기계를 이용해 귀족들의 사치품을 모방했다. 장인들이 일일이 만든다면 가격이 비싸지겠지만, 새로운 생산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자 상품의 가격을 낮출 뿐만 아니라 형태도 좀 더 쉽게 주무를 수 있었다. 즉 다시 한번 재료의 저항을 낮출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석기시대 점토보다 재료를 더 쉽게 더 빠르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제조의 힘은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기보다 싸구려 모조품을 만드는 데 낭비되었다. 1851년에 개최된 런던 대박람회에 출품된 상품들이 대표적인 사례다.<사진 3> 제조업자들은 복잡하고 정교한 장식이 귀족적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졸부의 통속적 미감이었다. 존 러스킨과 같은 당시 예술비평가는 이것을 제조의 타락으로 여겼다. 그 타락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재료가 인간의 통제에 저항하는 힘이 대폭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사진 4> 찰스 보이지가 디자인한 예술공예운동의 데스크, 1896년


이런 현상에 대한 강력한 저항운동이 19세기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공예운동이다. 그는 왜 굳이 생산성이 낮은 수공예를 고집했을까? 산업혁명 시대 노동자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장인은 기계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리 단단한 재료라고 하더라도 수 천, 수 만 번 반복해서 다루게 되면 어느 순간 경지의 솜씨에 신의 솜씨만으로 재료의 저항에 맞섰다. 그런 과정에서 숙련도가 높아졌고, 그것은 자부심이 되었다. 예술공예운동의 본질에는 재료의 저항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것에 있다. 공장은 새로운 대량생산기술을 이용해 재료의 저항을 거세함으로써 오히려 타락했다. 반면에 공예가들은 저항을 기계가 아닌 오직 도구와 자신의 손만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로써 그들은 물건을 구원할 수 있었다.<사진 4> 재료의 저항을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물건은 타락하기 쉽다. 왜냐하면 재료를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이 절제보다는 과잉의 욕망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사진 5> 바우하우스의 마리안느 브란트가 디자인한 재떨이, 1924년


장식이나 패턴은 고대로부터 늘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쉽게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계기술이 발달하자 제조업자들은 장식과 패턴을 더욱 과잉되게 구축했던 것이다. 제조업자들은 물건의 쓸모라는 목적은 잊어버리고 기술을 자랑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따라서 기술이 발전해 재료의 저항이 줄어들수록 그것을 다루는 디자이너는 조형에 대한 높은 안목이 필요하다. 산업혁명 시기 제조의 타락을 목격한 예술 비평가 존 러스킨은 제조에서도 도덕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20세기 전반기 모더니즘 운동은 바로 기술의 힘을 얻은 디자이너가 그 기술을 제멋대로 사용하지 않도록, 절제할 수 있도록 제조의 도덕성을 가르쳤다. 장식을 제거하고 재료를 정직하게 사용하고 순수형태만으로 건축과 물건을 디자인하도록 한 것이다.<사진 5> 재료의 저항을 무력화시켜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마술봉을 손에 쥐었는데도 오히려 그 욕망을 절제함으로써 산업혁명 시기의 제조품과 같은 천박한 물건의 생산을 억제했다.

<사진 6> 튤립 모양을 흉내 낸 플라스틱 의자, 1960년


20세기 중반에 또 다른 저항 없는 재료가 등장했다. 바로 플라스틱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통찰한 것처럼 플라스틱은 “기원은 단수지만, 효과는 복수”다. 다시 말해 원료는 하나지만 무한한 변신이 가능하다. 딱딱한 나무처럼, 하늘거리는 직물처럼, 부드러운 고무처럼, 화려한 보석처럼 변신한다. 심지어는 몸속에 삽입되어 신체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저항이 없는 재료가 등장한 것이다. 플라스틱을 손에 얻게 되자 모더니즘의 절제주의가 무너지고 화려하고 요란한 장식과 형태가 다시 부활했다. 팝 디자인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디자인이 그것이다.<사진 6> 20세기말에는 플라스틱을 넘어 재료와 조형의 저항을 또 한 번 무너뜨린 막강한 기술이 등장했다. 바로 컴퓨터다. 컴퓨터 역시 요란하고 장난스러운 디자인의 양산을 낳았다. 특히 질서를 중시하는 모더니즘에 저항해 무질서의 미학을 추구했다.<사진 7> 이런 도전은 컴퓨터 편집 프로그램이 낳은 것이다. 저항이 없는 기술과 재료가 등장할 때마다 조형은 춤을 췄다. 하지만 21세기 애플은 20세기 중반의 모더니즘을 소환해 다시 한번 절제된 디자인을 유행시켰다.

<사진 7> 데이비드 카슨이 디자인한 잡지 <레이건>의 표지, 1994년

지금은 어떨까? 점토, 대량생산 기계, 플라스틱, 컴퓨터에 이어 또 한 번 저항을 무력화하는 기술이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인공지능이다. 특히 2차원 평면의 사진, 영상, 그래픽 분야에서 인공지능은 사람이 손을 쓸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준다. 그저 말만 하면, 정확히는 키보드를 두드려 명령어를 입력만 하면 영화도 만들어준다. 산업혁명 전에는 재료의 저항을 극복하는 힘은 오직 손의 훈련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재료와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손의 능력, 즉 테크닉을 조금씩 잃어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20세기까지는 여전히 디자이너들은 자신만의 기술을 익혀야 했다. 컴퓨터도 기술을 익혀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이르면 사람이 익혀야 하는 기술이 대폭 줄어든다. 테크놀로지의 목적은 사람이 가진 테크닉을 무력화하는 데 있다. 기술사회는 사람을 그저 소비만 하는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듯하다. 현대인은 옛날 사람보다 훨씬 무기력하다. 모든 것을 컴퓨터와 같은 기술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테크닉이 점점 필요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테크닉이 없다는 것은 재료의 저항을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술이 없는, 즉 기술의 한계를 모르는 사장이나 클라이언트는 뭐든지 명령만 하면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디자인은 무절제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요즘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영상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산업혁명 시대 대량생산 기계기술의 등장으로 제조의 타락이 일어난 것과 비슷한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주로 영상 분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인공지능이 제품을 디자인하더라도 물리적으로 구현되는 과정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반면에 가상의 이미지인 영상은 그런 한계가 없다. 배우도 필요 없고 무대도 필요 없고 카메라도 필요 없다. 다시 말해 더욱 재료의 저항이 없는 분야인 셈이다. 그러자 별의별 가짜 영상을 양산해 낸다.


새로운 재료와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초창기에는 요란하고 천박한 조형의 세상이 활짝 열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인공지능의 초기인 지금, 다시 말해 저항 없는 재료와 기술의 시대에는 무절제와 혼란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재료의 저항, 그리고 여러 물리적 한계는 언제나 인류를 무절제에서 구원했다. 마치 불안과 고통, 무기력과 무능력, 질병과 근심, 가난과 온갖 소모적인 감정에 시달리는 사람의 속성 자체가 그를 도덕적 타락에서 구원하는 힘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기술 분야에서만큼은 그런 한계와 저항을 무너뜨리고자 온 세계가 에너지를 쏟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형의 세계에서 그 어느 때보다 타락의 위기에 있다. 저항을 무력화하는 재료와 기술은 언제나 타락의 유혹을 부추겨왔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