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래희망은 그냥, 나! 2024.12

2024. 12. 31. 09:20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My Future Hope Is Just Me!

 

 

 

You Can Be Anything 캠페인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의 바비 인형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어른들이 내게 물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나의 대답은 자주 바뀌어서 간호사였다가 선생님이었다가 여섯 살에는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시인이라는 장래희망은 속으로만 품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시인은 어른들이 머리 쓰다듬을만한 유망한(?) 직업은 아니라는 자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는 입 밖에 내기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지 않아서 내가 살아온 시대는 꽤 오랫동안 여자는 비록 ‘인형’이라도 무엇이나 될 수는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1959년 3월 9일 뉴욕 장난감박람회에서 처음 등장해서 출시 첫해에만 30만 개가 넘게 팔린 인형 세계의 셀러브러티, 마텔사(Mattel社)의 바비 인형도 같은 처지였다.
바비는 성인 여성의 모습을 한 인형의 신호탄이었다. 바비 이전의 인형은 거의 아기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바비는 파란 눈에 금발머리, 수영복 차림이었는데, 허리둘레가 머리둘레보다 가느다란 비현실적인 몸매였다. 60년대 바비의 직업은 전통적으로 여성 종사자가 많은 직종인 치어리더, 패션모델, 간호사, 항공승무원 등에 머물렀다. 1965년에 출시된 우주비행사 바비나 1973년에 나온 외과의사 바비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만약 바비의 직업이 여기에서 그쳤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1985년 “소녀들은 모든 걸 할 수 있습니다(We Girls Can Do Anything)”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마텔은 최고경영자(CEO), 파일럿, 경찰관, 소방관 등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직업의 의상을 입은 바비를 출시했다. 이 캠페인은 2015년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You Can Be Anything)”라는 슬로건으로 재탄생했다. 그에 걸맞게 바비의 직업은 컴퓨터 엔지니어, 카레이서, 건축업자 등으로 확대되었고 최근에는 천체물리학자, 야생동물 환경보호 활동가, 극지 해양생물학자, 야생동물 사진작가, 곤충학자 등 과학계로 넓어졌다. 지금까지 200개가 넘는 직업군의 바비 인형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탄생 후 65년이 흐르는 동안 변한 것은 바비의 직업만이 아니다. 금발의 파란 눈, 기형적인 8등신 몸매였던 바비의 외모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흑인과 아시아인, 라틴아메리카인 바비가 등장했고 2016년에는 키가 작고, 몸집이 작거나 통통하고, 굴곡지기도 한, 현실적인 신체비율과 다양한 피부색, 눈 색깔, 헤어스타일을 가진 바비가 출시되었다. 휠체어를 탄 바비, 보청기나 의족을 하고 있는 바비도 세상에 나왔다.



최초의 바비와 다양한 인종과 신체조건을 가진 바비들


2015년에는 “가능성을 상상하라(Imagine The Possibilities)”라는 슬로건의 바비 광고가 전파를 탔다. 이 영상에서 어린 소녀들은 실제 성인들이 일하는 공간에 등장하여 각자 자신이 꿈꾸는 직업인처럼 행동한다. 어린 소녀들은 성인들이 앉아있는 대학 강의실에서 뇌에 대해 강의하고, 동물 병원에서 진료하기도 한다. 자신보다 두 배는 키가 큰 축구팀을 훈련시키고, 파일럿이 되어 비행기를 조종해서 가본 곳들을 이야기하고, 박물관의 공룡 화석 앞에서 트리케라톱스에 대해 설명한다. 각 장면에서 어른들은 처음엔 어린 소녀들의 천연덕스러운 행동에 놀라다가 미소를 지으며 지켜본다. 마지막에 이 모든 상황이 소녀가 바비 인형을 가지고 노는 상상 속 장면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광고는 바비 인형이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어린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키우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자막)
여자 어린이들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바비를 가지고 노는 소녀는, 자신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바비_캠페인 영상_YOU CAN BE ANY THING : Imagine The Possibilities_2015


마텔은 2019년 바비 60주년 기면 홈페이지에서 “바비는 소녀들에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영감을 준다. 공주에서 대통령, 우주비행사부터 사육사에 이르기까지 바비가 깰 수 없었던 플라스틱 천장은 없다.”라고 밝혔다. 지난 60년 동안 바비의 외모와 이미지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변하는 것에 따라 극적으로 변화해 왔다. 여성의 역할과 독립성, 다양성이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가치를 반영하고 때로는 선도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이러한 시도가 바비 인형이 불러일으킨 여러 가지 논란을 잠재우고 급감하는 매출을 끌어올리려는 노림수라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어린 소녀들에게 긍정적인 역할 모델이 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비보다 몇 해 늦게 태어난 나는 오는 12월 30일에 60살이 된다. 바비는 65년 동안 200여 가지의 직업으로 변신했는데 나는 비슷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고작 학생 아니면 회사원, 딸 아니면 엄마 사이를 지루하게 오가고 있다. 바비 같은 모래시계 몸매는 꿈에서도 가져본 적 없고 바비의 트레이드마크인 분홍 원피스나 하이힐을 신어본 적도 없다. 바비가 다양성과 독립의 가치를 내걸고 진화해온 것과 비슷한 세월만큼 나는, 변변한 자랑 하나 없이 차곡차곡 나이를 먹었다. 내가 나이 드는 동안 천둥벌거숭이 내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태산 같던 내 엄마는 살금살금 늙었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을까? 
울고 웃고 넘어지고 일어나며 예순 해를 겪는 사이에 꽃이 피고 꽃이 지듯이 사람이 오고 사람이 갔다. 달이 뜨고 달이 지는 것처럼 사랑이 오고 사랑이 떠났다. 후회가 함께 왔고, 아쉬움이 따라서 갔다. 예순 번의 여름을 겪었어도 여태 여름의 더위가 겁나고, 그만큼의 겨울을 또 나고도 겨울의 추위가 무섭다. 사는 일이 언제 쉬워질까, 언제나 좀 만만해지려나….
셀 수 없는 우연이 겹치고 어긋나고 장난 같은 인연이 만나고 끊어지며 예순 살의 내가 되었다. 바비 인형을 가지고 놀지 않아서일까?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은 적 없었고, 무엇이 되고 싶다고 간절하게 소망한 적도 없다. 대단한 ‘무엇’이 되지 못했고, 뽐낼만한 재산이나 명예도 없다. 나는 언제나 그냥 ‘나’였고 앞으로도 그냥 ‘나’일 것이다. 
그래도 큰 불만은 없다. 다시 산대도 더 잘 살 자신은 없다. 다시 산대도 공짜로 받은 위로, 염치없이 누린 호의와 보살핌, 무심코 받은 수많은 당신들의 악수와 안부, 문자와 목소리를 대신할 무언가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여섯 살로부터 한참을 지나서 마주친 낯선 나의 60을 기념하여 장래희망을 새로 정한다. 부끄럽지 않은 나, 고요하고 우아한 나, 마음이 말랑말랑한 나, 아니 그냥 나!

 

 

https://www.youtube.com/watch?v=kat5CYtfRzY 
바비_캠페인 영상_YOU CAN BE ANY THING : Imagine The Possibilities_2015_유튜브 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2019)』 시리즈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