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30. 09:40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⑯ The traces Gosi Village’s dreams have left in space, and the future
고시촌이 꾼 꿈은 무엇이었을까? 본디 입신양명은 사회나 국가에 이바지한다는 뜻이었겠으나, 세상이 어디 그렇게 한가하기만 하던가? 오래전부터 이미 출세와 영달의 다른 이름으로 변질하였으니….
등용문이라 했다. 시험을 통과하면 살아생전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누렸고 죽어서까지 명예를 오로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 너도나도 이 관문을 통과하려 모든 걸 걸고 매달릴만한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이렇듯 등용문을 통과한 동량들은 대체로 초심을 잃었고 특권의식에 사로잡혔다. 최근이 아닌, 뼛속 깊이 내려오는 디엔에이(DNA)다.
특권의식을 넘어 지배의식까지 갖기 일쑤다. 2024년 대한민국을 호령한다는 군상들 면면을 보면, 이 암담한 현실이 어디에서 연유하였는지 쉬이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과거(科擧)가 뿌리이니 이미 1,000년을 넘겨 온 양태로 모두를 가르고 지배하는 경계선이었다. 과거시험이 일제 강점기에는 고등문관시험으로, 해방 후에는 고등고시로 변모했을 뿐이다.
신림동은 1960년대 도심에서 밀려난 빈민이 이룬 공간이다. 숫자로 나열된 옛 동명(洞名)은 밀리고 밀려 우후죽순 형성된 순서에서 말미암았다. 1975년 우리나라 최고라는 서울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해 온다. 서울대 존재는 이곳에 ‘고시촌’이라는 특이한 공간을 창출해냈다.
고시촌의 동명인 ‘대학동’의 행정구역은 서울대학교를 망라하는 넓은 공간이다. 관악산에서 발원한 구불구불한 도림천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서림동에도 고시촌은 퍼져있었다. 1980년대를 지나며 대학동 골목을 ‘녹두거리’라 불렀고‘독재 권력의 주구가 되려 한다’며 이곳 수험생을 터부시하기도 했다.
도심에서 밀려난
소설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를 신문에 연재하던 1966년의 서울 인구가 377만 명이다. 4대문 안팎과 영등포를 망라한 한정된 공간이었으니 지금 보아도 가히 만원이다. 전쟁이 끝난 1954년 124만, 1959년 200만, 1967년 400만, 1970년 500만이니 불과 16년 사이 380만 명이 몰려든 셈이다.
이는 전적으로 사회변동에 따른 인구증가다. 여기에 인구증가의 상징인 베이비붐이 밀려온다. 1963년 서울시는 행정구역 확장으로 이에 대응한다.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변두리에 빈민촌을 형성한다. 당장 생계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거주 공간 확보와 안정된 취업,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극복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나라는 폭발적으로 몰려드는 인구를 수용할 능력은 물론 생각마저 없었다.
서울은 빈민이 점거한 도시로 변해갔다. 산등성이를 비롯한 빈 땅엔 예외 없이 판잣집이 꽉 들어찼다. 주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두꺼운 종이상자·루핑(섬유에 아스팔트가 가공된 방수포)·목재·아연철판 등으로 얼기설기 지었다. 빈민촌은 상상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비바람도 막아내지 못했다. 분뇨는 일상적으로 발에 차인다. 마시는 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 쓰레기는 그 자체로 재활용품이다. 빨래와 목욕은 언감생심이다. 위생은 물론 난방과 기초 생활도 해결 난망이다. 거지 떼가 몰려 사는 모습 다름 아니었다. 최악의 주거환경이었다.
1961년 8만 8,000여 동, 1964년 11만 6,000여 동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도로 및 상하수도 등 기반 시설은 그림의 떡이다. 하물며 위생을 따질 처지인가? 나라는 이들이 사는 집에 ‘무허가 불량 주택’이란 영광스러운 별칭을 붙여 주었다.
선거철이면 으레 선심을 베푼다. 입으로 떠벌이는 허가였고 합법 승인이었다. 선거가 끝나면, 빈민촌은 더 넓어졌다.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 1960년대 내내 행해진 ‘정착촌 조성’도 큰 몫을 차지했다. 일종의 ‘무대책 철거 이주 정책’이다. 오로지 도심에서 좀 더 먼 곳으로 쫓아내려는 행정이었다. 봉천동과 신림동, 미아리와 상계동이 대표적이다. 정착촌은 그 자체로 빈민의 장소이동에 불과했고, 이들 정착촌을 기점으로 주변으로 더 넓은 빈민촌이 확장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무작정 상경이 빗어낸 비극이다. 안주하지 못하는 정주 여건과 불안정한 고용이 고스란히 투영된 모습이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이 서울로 상경한 농부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과연 서울은 도시빈민으로 꽉 채워진 만원이었다.
고시촌의 형성
서울대학교가 공학과 의학, 농학 계열을 제외하고 시내에 산재한 캠퍼스를 모아 1975년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해 온다. 주변은 빈민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환경이다. 전국에서 상경한 학생들이 자취나 하숙으로 주변에 흡수된다.
당시 서울대 법대 입학은 출세를 보증하는 수표였다. 사법, 행정, 외무의 ‘3대 고시’라는 말이 유행했다. 학생들이 자취, 하숙하는 공간에 고학하는 고시생이 자리 잡는다. 1970년대 말 서울대와 가까운 도림천 남북 공간을 고시생이 점유하기 시작한다. 절간이나 궁벽한 산촌에서 행해지던 수험생활과는 전혀 다른 양태다.
이들을 겨냥한 전용 학원이 등장한다. 그런 영향이었는지, 1980년 즈음 기존 낡은 집들이 구조를 변모시켜 수험생을 수용하는 형태로 변해간다. 소위 절대 수요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수험생 전용 고시원의 탄생이다. 자취나 하숙과는 차원이 다른 거주 공간이다. 국가고시 등을 준비하는 장기 수험생들을 주 대상으로 했다.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무척 협소한 경제적인 공간구성이다. 무엇보다 저렴한 임대료에 시험을 준비할 여건을 갖췄다는 특징을 지녔다.
신림동으로 서울대 재학생이나 졸업생은 물론 고시를 준비하는 다른 학교 출신까지 몰려든다. 고시생 전용공간으로 성장이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 공간에서 이뤄지는 정보교환이나 고단한 수험생활을 공유하는 동류의식이 공간을 규정짓는 특징으로 자리한다. 고시촌 특유의 정서를 뒷받침하는 시설이 뒤따라 들어선다. 고시촌 문화의 형성이다.
공간 해체와 재구성
1980년대 중후반부터 서울에 재개발 열풍이 불어온다. 신림동도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도시빈민이 거주할 절대공간이 소멸해 간다. 단독 주택도 하나둘 재건축이 이뤄져 4∼5층의 다가구로 변화해 간다.
이때를 전후하여 고시원의 용도가 전용되기 시작한다. 값싼 임대료는 지불 능력이 낮은 계급이 주거 용도로 점령해 가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2000년대 들어 독신 회사원이나 저임금과 비정규직 등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고시원이라는 열악한 주거시설로 대거 몰려든다. 거주 여건이 더 악화하는 ‘하방 여과’를 보여주는 현상이 이때 서울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신림동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주 구성원은 여전히 수험생이었다. 고시촌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공간 해체에 직면한 건, 역설적으로 제도 탓이다. 뼛속까지 특권이던 고시가 폐지되면서부터다. 행정고시가 2010년, 외무고시는 2013년 5급 국가공무원 공개경쟁 채용 시험으로 바뀐다. 사법고시는 2017년 폐지되었다.
고시 폐지로 신림동도 노량진을 닮아가지만, 기업형 대형학원의 부재와 공간 제약으로 활성화하지 못한다. 5급 공채를 준비하는 수험생도 있지만, 옛 명성에는 이르지 못한다. 신림동 고시촌이 유지되던 근간인 사법고시 폐지가 결정타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고시촌은 이제 명맥만 근근이 유지하는 실정이다. 열악한 대중교통으로, 고시촌 주변 임대료는 가격경쟁력을 갖췄다. 이런 복합 요인으로 수험생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독신 회사원이나 젊은 노동자들이 채워가는 중이다.
꿈꾸는 자는 언제나 청년이다. 장년에 접어든 고시촌도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2022년 5월 개통한 경전철 신림선이 변화의 촉매제가 될 개연성이 높다. 역 이름 ‘서울대 벤처타운’에 공간이 꾸고 있는 꿈이 축약되어 있다. 여러 시도가 진행 중이다. 학문과 연구 활동에 기반을 두고, 꿈꾸는 청년 기업가의 도전정신과 그들의 문화를 결합하여 공간을 변화시키겠다는 구상으로 읽힌다.
공간이 꾸는 꿈이 실현된다면, 수만 명 젊은이가 매일 이 공간을 소비할 것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등용문을 통과하고자 했던 과거 젊은이의 꿈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간이 꾸는 꿈은 도전정신과 패기, 기발한 기술로 세계를 바꾸려는 것이다. 뛰어난 기술 하나가 세상을 어떻게 바꿔냈는지는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관악산에서 흘러내린 도림천 물줄기가 한강을 넘어 서해로, 나아가 전 지구의 바다 구석구석까지 채워나가길 기원한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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