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31. 09:50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⑮ Nevertheless, it is a space for youth to follower their fluttering dreams
통행이 뜸해진 노량진역 바깥 계단은, 셀 수 없을 만큼의 발길에 닳고 닳아버린 모습 그대로다. 노량진역은 여전히 바람이 맵차다. 수많은 청춘이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차가운 바람에 움츠러든 어깨를 옷깃으로 여몄을 것이다. 1970년대 끝자락부터 진학에 실패한 청춘들이 내몰리듯 노량진으로 찾아 들었다.
절치부심. 빛나는 청춘의 한때를 희망이란 가느다란 빛을 갈구하며, 이 공간에 자기를 가두고 기댔다. 종로에 있던 입시학원이 옮겨와 진학에 실패한 청춘을 품으면서, 노량진은 학원가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하지만 풍경이 변했다. 한 시대를 휩쓸고 간 IMF 구제금융이 사생아처럼 남겨놓은 신자유주의 광풍에 모두 유폐 당한 모습이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할 만큼의 극한 경쟁이다. 간신히 취업한 직장은 언제 내몰릴지 모르는 살얼음판이다. 정년이 보장되는 공직이 인기를 끌고, 그 길에 접어들려는 기약 없는 경쟁에 청춘은 불나방처럼 기꺼이 자기를 내던진다. 볼모와 유폐, 저당의 시간이 만들어 낸 공시촌의 모습이다.
교과서에 실린 수필에서 ‘청춘!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라 배웠다. 정말 그러한가? 지금의 청춘은 길을 잃었다. 아르바이트에, 불안정하고 위험한 비정규직 일터에, 대학을 졸업한 청춘 절반이 일터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유폐하며 두텁게 세상과 쌓은 벽을 높여가는 현실이다. 소위 스펙을 쌓아 높은 연봉의 직장에 취업하려 혹은 다른 대학에 편입하려는 청춘들도 노량진엔 넘쳐난다. 그래서 청춘이란 말에서 어떤 두근거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측은지심을 넘어 수오지심이 밀려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빙하기 청년
2000년대 초 비정규직 청년의 평균 임금 ‘88만 원’은 소외 계급으로 전락해버린 세대를 진단하는 고유명사였다. 88만 원 세대는 그대로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서 다시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 꿈까지 포기한 ‘오포세대’를 넘어 거의 모든 미래를 포기할 처지를 대변하는 ‘n 포 세대’로 치환되었다.
청춘은 오늘도 암울한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미래를 향한 낙관적인 전망으로 자신을 위해 즐겁게 투자해야 할 시기에, 오늘의 청춘은 오히려 절망의 미래를 간파하고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아 버렸다. 심지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는 체념과 자조가 청춘의 정신과 의지를 갉아먹는다. 우울과 절망에 휩싸여 낙오자 대열에 기꺼이 자신을 합류시킨다. 이런 낙오 대열을 누가 만들어냈단 말인가?
대학교는 물론 직장까지 정해진 계급에 따라 배정되고 나뉘고 갈리는 극심한 피로사회다. 이 구조적인 모순을 깨뜨리지 못하는 한 희망은 성과주의와 승자독식이라는 망상에 불과하다.
작금의 청춘에게 차별보다는 다름, 증오와 저주보다는 함께라는 포용과 관용, 스스로 낙오하기보다는 삶과 생을 더 치열하게 사랑해 보라 말하고 싶다. 길은 어쩌면 거기서부터 열릴지 모른다.
공간 형성
고시원이 있었다. 방은 최소한의 생활과 학업이 가능한 구조로 무척 협소하다. 고시 준비 전용으로 탄생했고, 쪽방을 방불하는 극한의 공간 경제성을 추구했다. 신림동에서 집단화했던, 꿈꾸는 청춘의 특화된 공간이었다.
1990년대 들어 노량진에도 하나둘 고시원이 생겨난다. 입시 공간에 교원 임용고시학원이 길을 연다. IMF를 전후하여 공무원 임용 전문학원이 등장하고, 각종 자격증 등 취업 관련 학원이 성황을 이룬다. 이때 이미 취업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에 따라 수험생은 시간을 아낄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당연하게 노량진에도 고시촌이 형성되었다.
노량진 학원가는 1990년대 말 대형화의 길을 걷는다. 기업형 학원도 다수 등장한다. 대형화 추세에 맞춰, 학습공간도 다양화한다. 변형된 기숙 형태다. 거주공간은 규모와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의 가격에 이름도 여럿이다. 그러함에도 모두 고시원 변형에 불과하다. 수요자인 수험생의 경제력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소위 노량진 공시촌의 완성이다.
공간은 노량진역을 중심으로, 노량진로 남측에 넓고 길게 분포한다. 동작구청에서부터 동작경찰서를 지나 사육신 공원 맞은편까지가 동서 방향이고, 남북은 대로변에 연이은 대형학원 남쪽으로 주택가 곳곳까지 파고든 고시원과 원룸, 크고 작은 상점과 근린시설이 구성하는 공간이다. 체력검정 대비시설, 스터디 카페와 독서실, 저렴한 뷔페식당과 편의점, 분식점이 즐비하다. 전자오락실과 동전 노래방, 부담 없이 가볍게 한잔할 수 있는 주점 골목도 공간이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다.
수험생들은 비용과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처지에 먹고 쓰는 비용과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 간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컵밥 거리’는 이런 맥락에서 최적 형태로 탄생했다. 노량진로 동쪽에 줄지어 선 컵밥 거리는 고단한 청춘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마저도 줄어든 공시 열풍, 인터넷 강의로 수험생이 빠져나가면서 문을 연 곳은 몇에 불과하다.
고시원이었거나 독서실이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집들이, 곳곳에서 리모델링 중이다. 그만큼 수험생 수요가 감소했음을 대변하는 현상이다. 인터넷 강의가 일상화하여 비용 부담을 줄이고 있다. 굳이 노량진이 아니어도 공부할 여건이 갖춰진 셈이다. 여기에 응시생의 절대 감소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이다.
수십 년래 최저라는 2022년 7급 공무원 경쟁률이 이런 현상의 징표다. 원인은 여럿이다. 그중 제1의 요인이 낮은 임금이다. 9급 공무원의 퇴직이 증가하고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고 여전히 길거리로 나서는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현재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그러함에도 공간은 살아있고, 정해진 규칙과 관성에 따라 움직인다. 공시생의 일과에 따라 깨어난 공간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공부하며 토론하고 모색하다가 곤한 하루의 잠에 빠져든다.
새벽 5시 경이면 공간이 깨어난다. 부지런한 발걸음이 대형학원에 딸린 자습실을 향한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고요를 대신하는 하루의 시작이다. 9시 언저리에 오전 수업이 시작한다. 강의실 자리도 경쟁이 극심하다. 짧은 두어 번 휴식 시간을 포함한 4시간 오전 강의가 13시에 종료한다.
점심시간, 공간은 시장통처럼 분주해진다. 수험생 전용 뷔페식당과 분식집이 공시생 단골 메뉴다. 대부분이 혼밥족이다. 편의점을 이용하는 수험생이 상당수다. 인스턴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거나 군것질을 위해서다. 알려진 만큼 컵밥의 이용률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인다. 거리와 시간, 편의성 등이 제약 요소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점심을 해결한 일부가 동전 몇 개로 오락실을 찾아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 놓는다. 오후 강의가 없는 수험생들은 스터디 카페나 독서실, 자습실로 자리를 옮긴다. 18시를 전후해 저녁 식사가 이뤄지고, 이때부터 삼삼오오 토론하고 학습하며 정보를 공유하는 모임이 활기를 띤다. 22∼23시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하루의 어둠을 뒤로하고 각자의 거주공간으로 썰물처럼 다시 스며든다. 꽉 짜인 이런 일과가 365일 쉼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공간이 노량진 공시촌이다.
시대의 숙제로
노량진이라는 공간에 청춘의 시간을 유예한 수험생은 결코 ‘이생망’이 아니다. 이들은 노량진 밖을 ‘속세’라 칭한다. 첩첩산중에 자리한 절간도 아닌데 말이다. 이들이 이 공간을 소비하는 방식을 보면 답은 명쾌해진다. 몸이건 마음이건 노량진을 결코 안정된 생활공간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수험생 신분의 불안을 한 평 남짓 고시원에 몸을 누이며 미래를 희구한다. 발 디딘 자리에서 뼈를 깎는 고통으로 기꺼이 경쟁을 감내하고자 하는 청춘이다. 노량진이라는 공간을 결코 절망으로 읽고 소비하지 않는다. 주어진 생의 앞으로의 삶을 알차게 꾸리려 꿈꾸는 이들이다.
흔히 실패를 청춘 개개인의 문제로 돌리곤 한다. 기성세대 사고방식 깊숙이 뿌리내린 ‘자기 계발’이란 논리를 앞세워 실패가 단지 능력과 노력 부족이라 치부한다. 그게 아님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현재 청춘은 극심한 피로사회가 양산해낸 피해자일 뿐이다.
청춘의 실패와 체념, 절망이 개인 차원이 아님은 물론 세대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사회 전체 문제이자 공동체가 발 벗고 나서 해결해 내야 할 시대의 숙제다. 더 빛나야 할 청춘의 앞날을 응원하는 게 해줄 수 있는 전부라는 현실이 그저 가슴 아플 뿐이다. 그러함에도 속세를 벗어난 노량진 공시촌은 오늘도 퍼덕이는 청춘의 푸른 꿈을 꾸고 있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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