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8. 09:20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서울의 봄>을 보면, 두 주인공인 전두광과 이태신이 만나는 장면이 있다. 이때 키가 큰 이태신(정우성 역)이 전두광(황정민 역)을 내려다보고 전두광은 이태신을 올려다본다. 화면에 한 사람만 등장할 때 이태신은 앙각촬영, 즉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각도로 촬영하고, 전두광은 부감촬영, 즉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촬영한다. 두 사람을 함께 보여주는 장면에서 전두광은 이태신을 올려다보는 것이 싫은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이야기를 한다.<사진 1> 물리적인 키 차이가 정신적인 키 차이는 아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런 신체 차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에서 그 사람의 성격을 판단하기도 한다.
스파이크 리 감독이 연출한 1989년작 <똑바로 살아라>를 보면, 흑인 청년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사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흑인 청년을 비출 때는 앙각으로 촬영하고, 가게 주인인 한국인을 보여줄 때는 부감으로 촬영함으로써 한국인은 흑인과 견주어 굉장히 작은 인종임을 강조한다. 게다가 대화 내용이 영어 못하는 한국인을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있어서 관객은 더욱더 한국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판단하기 쉽다. 이처럼 촬영은 사람의 신체를 상대적인 조작하여 메시지를 전달한다. 촬영이란 ‘의사소통’의 기술이다.
이른바 ‘얼짱각도’라는 것도 그렇다. 얼굴을 살짝 위쪽에서 촬영한다. 그러면 눈은 평소보다 더 커지고, 턱은 평소보다 더 갸름해져서 귀여워 보인다. 얼짱각도의 기원은 실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신체 언어’에서 비롯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또는 여자가 남자 애인에게 머리를 수그리고 상대방을 올려다보는 자세는 ‘용서’를 구하는 언어라고 해석한다. 키가 더 작은 사람이 키가 큰 사람을 향해 머리를 수그린 채 올려다보면, 그 사람의 얼굴은 부감촬영의 대상처럼 된다. 부감촬영된 얼굴은 상대적으로 눈이 더 커지고 턱은 갸름해지며 이마는 더 많은 면적을 차지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 볼에 공기를 불어넣으면 효과가 배가 된다. 이마가 차지하는 면적이 넓고, 눈이 크고, 턱이 갸름하고, 볼이 포동포동한 얼굴은 바로 아기의 얼굴이다. 따라서 머리를 수그리고 상대방을 올려다보는 자세는 자신을 아기의 얼굴로 변장시키는 기술이다. 무기력한 아이 얼굴을 만들어 보호본능을 자극함으로써 잘못을 용서받으려는 것이다. 이것은 말로 용서를 구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사람은 언어를 사용하기 전 먼저 몸으로 의사소통 해왔고, 그만큼 몸의 언어는 역사가 더 길고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볼을 잔뜩 부풀려 얼짱각도로 셀카를 찍는 심리에는 타인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려는 욕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인물화의 역사는 바로 그 몸의 언어를 묘사해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이나 귀족 남자를 묘사할 때 그들은 언제나 한쪽 팔을 허리에 갖다 대서 상대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쪽 팔은 긴장을 풀고 늘어트림으로써 관대함을 보이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다리를 벌린 채 당당하게 서 있다. 그것은 군주와 귀족의 위엄과 우월함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런 방식으로 헨리 8세, 카를 5세, 루이 14세 등 왕들의 공식 초상화가 제작되었다.<사진 2>
왕과 귀족의 자세는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의식적인 의도에서 나온다. 하지만 어떤 자세는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온다. 예를 들어 사람이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몸이 움츠러든다. 고흐의 그림 <슬픔에 빠진 노인> 속 노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숙이고 있다.<사진 3> 자신의 고통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없는 이런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나온다. 축구 경기에서 결정적인 골에 실패한 선수나 그런 장면을 보는 팬들은 다 같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뒤통수를 부여잡는다. 이런 행위는 너무나 즉각적이고 자연스러워서 의식이 명령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다. 너무나 정직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언어로 즉시 인지한다.
이처럼 몸의 움직임은 ‘언어성’을 가지고 있는데,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텔(tells)’이라고 말한다. 텔은 언어는 물론 몸짓이나 옷차림 등 자신의 감정과 마음의 태도와 성향을 드러내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의도적이기도 하지만 의도가 없을 때 더욱 정직하다. 벅찬 기쁨, 억누를 수 없는 고통, 차오르는 슬픔 등은 반드시 말보다는 육체를 통해 더욱 절절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말도 그 내용보다 말을 전달하는 소리의 높낮이나 질감, 호흡 등이 더욱 정직하기 마련이다.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조언은 그래서 나온다. 다시 말해 말의 내용보다 말의 몸짓, 말의 육체성에 더욱 주목하라는 뜻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말로는 가장할 수 있지만, 거짓말을 부인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몸까지 통제하지는 못한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 육체는 미세한 떨림을 목소리와 몸이라는 육체성으로 전달한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의 입술이 침묵하고 있다면, 손가락이 나불거릴 것이고, 털구멍에서 비밀이 새어 나올 것이다.” 그러니 몸은 말보다 정직하다.
대체로 어릴수록 몸을 통제하지 못하므로 아이의 신체 언어는 정직하다. 사람은 성인이 되어가며 점차 몸을 통제하는 기술을 익히는데, 그것은 거짓말, 즉 가장의 기술이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완벽하게 몸을 통제하는 사람은 없다. 그 기술을 더욱 완벽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전문가들이 있으니 바로 포커 도박사들이다. 포커 도박사들은 손으로 칩을 놓는 강도의 미세한 차이, 호흡과 혈색, 다리의 변화, 시선의 방향 같은 다양한 텔을 포착하여 상대방이 어떤 패를 지녔는지 추측한다. 좋은 패를 지니든 나쁜 패를 지니든 어떤 식으로든 몸은 그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커페이스란 그런 단서를 상대방에게 제공하지 않는 고도의 기술인데, 그것은 의식이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의식은 몸을 통제하기 어렵다.
의식이 몸을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의사소통의 세계가 있다. 바로 온라인 비대면 대화다. 21세기 라이프스타일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육체성이 완벽하게 제거된 대화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에는 몸짓, 혈색, 호흡, 목소리의 톤, 눈빛이 드러나지 않는다. 문자로 대화를 하면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므로 내용이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업계에서는 수천 가지 이모티콘을 개발해왔지만, 대면 대화가 갖는 표현의 풍성함을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사진 5> 대면 대화에서 가짜 표정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모티콘에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할 단서가 없다. 현대인은 점점 더 대면 대화를 어려워한다. 그에 따라 몸이 전달하는 정직한 언어는 점점 기회를 읽어가고 있다. 몸의 언어는 가장하려고 해도 결국은 진실을 말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정직한 편이다. 반면에 말과 문자는 상대적으로 자신을 가장하기 쉽다는 점에서 좀 더 기만적 언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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