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31. 09:40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⑧ What is the alley culture to keep and grow?
불과 얼마 전이 먼 옛날처럼 까마득하다. 추분이 지난 2022년 어느 날, 골목에 들어 ‘힙(hip)’하다는 걸 실감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어스름이 깔리자 골목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곳의 상징인 노가리에 생맥주를 즐기려는 발길은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끊이지 않았다. 젊은이는 물론 중장년의 회사원들, 나이 지긋한 분들까지 모든 연령층이 골목을 메우고 있었다. 지금은 아득해진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지난 풍경이다.
골목은 임차인이 일방적으로 쫓김을 당한 갈등 공간이기도 했다. 맨 처음 자리 잡아 골목을 키워낸 ‘을지OB베어’가 임차권 갈등으로 폐업하며 사라졌다. 을지OB베어가 사라진 자리는 다른 가게 차지가 되었으나, 이런 갈등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땐 몰랐다. 맞은 편에 자리했던 뮌헨호프 명성이 메아리로 들려온다. 골목을 오로지하다시피 한 만선호프 간판도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런 갈등이 골목을 지운 불씨였을까? 공사판으로 변해버린 골목이 삭막하기만 하다. 환하던 불빛이 사라지자 남아있는 가게들마저 초라해 보인다. 생맥주를 즐기려는 발길은 뜸해졌고 휑한 바람만 골목에 가득하다. 뭔가 소중한 걸 앗긴 듯 밀려드는 허전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재개발이 몰고 온 풍경이다. 새 건물이 들어선 후 골목은 과연 옛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맛의 공간
음식으로 특화된 골목은 도시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다. 신당동 떡볶이나 신림동 순대 등이 오랜 공간 조직을 형성한 곳이고, 청진동 골목은 피맛골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오랜 시간 명맥을 이어 온 곳도 부지기수다. 을지로에는 골뱅이 골목과 노가리 골목이 있다.
이런 곳들은 유사한 형성 과정을 거친다. 맛집 하나가 생겨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소문이 퍼진다. 주변에 같은 업종이 모여든다. 장소기억이 만든 집적화다. 상(商)도덕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이 생겨난다. 장소의 매력이 커질수록 강한 구심력이 생겨,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인다. 규모의 경제다.
맛에 대한 차별화가 경쟁으로 이어진다. 비법을 지키고 키워가려는 노력은 전쟁을 방불하나, 서로의 그것을 침해하는 행위를 범죄로 여긴다. 상생의 핵심이다. 아울러 맛 경쟁은 공간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방어벽이기도 하다. 같은 업종이지만 획일화된 맛으론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들은 본능처럼 터득하고 있다.
차별화한 맛은 다양한 기호와 선호를 만족시키며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고, 지나온 시간의 두께만큼 더 큰 명성을 쌓아간다. 어느 한 가게의 노력이 시작일 수는 있으나, 절대적인 몫을 차지하는 건 아니다. 특정 기능을 매개로 도시에 하나의 공간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일 뿐이다.
노가리 골목의 시작
노가리 골목도 을지OB베어 혼자 만든 곳은 아니다. 인쇄 골목 노동자들이 함께 만들어 낸 공간이다. 이 골목에 가장 먼저 자리 잡은 을지OB베어의 탄생과 성장, 변화도 순전히 이들의 힘이었다. 납기에 허덕이며, 수십 년 이 공간이 숨 쉬게끔 발길을 보태준 노동자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가리 골목은 철커덕거리는 인쇄소 기계 소리와 노동자의 땀이 함께여야 제맛이다.
1980년 OB맥주에서 프랜차이즈를 모집한다. 술과 안주를 표준화·규격화하려는 시도다. 을지OB베어가 그해 12월 문을 연다. 하지만 주류회사는 술 이외의 식품을 취급할 수 없다는 제도적 한계가 있었다. 부득이 을지OB베어는 안주류를 고민하기에 이른다. 최우선은 가격이었다. 당시 노가리는 가장 흔한 안주류 중 하나로 저렴한 가격에 소스와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창업주는 술값 또한 저렴하게 책정했다.
2년 남짓 골목을 청소하며 인쇄 노동자들과 얼굴을 익힌다. 그들과 동질성을 보여주면서 눈높이를 맞춰간 것이다. 인쇄 노동자의 발길이 이어졌다. 납기를 맞추느라 밤샘하고 퇴근 전 가볍게 생맥주와 노가리로 피로를 씻어낸다. 영업시간 또한 밤 10시를 넘기지 않았다. 다음날 근무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다. 상생이 무엇인지 몸으로 실천한 셈이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를 이어가며 단골이 생겨났다. 20년 단골은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말이 회자했다. 그런 노력과 마음이 2대를 이어 42년 한자리를 지키게 만든 힘이었다.
1989년 을지OB베어 맞은 편에 ‘뮌헨호프’가 문을 연다. 개업 전, 을지OB베어에 가게를 열어도 되겠냐는 양해를 구한다. 골목은 이런 끈끈한 미덕을 가진 동질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이 골목이 유명하게 된 가장 근저에 깔린 정신은 배려와 동류의식, 주변 영세한 인쇄소와 공장, 상점과 공생하려는 마음이었다.
생맥주 열풍을 타고 골목에 그만그만한 가게들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을지OB베어와 뮌헨호프의 존재는 여러 생맥주 가게를 이 골목으로 끌어들인 힘이었다. 서울 중구청은 조례로 ‘차 없는 거리’를 만들어 옥외 영업이 가능하도록 지원한다. 가득 펼쳐진 좌판 덕분에 골목에 새로운 문화가 꽃핀다. 덕분에 노가리 골목은 입소문을 타고 대낮은 물론 늦은 밤까지 환히 불 밝힐 수 있었다.
철거, 그리고 재개발
2022년 4월 21일 새벽. ‘서울미래유산’이자 ‘백년가게’에 선정된 을지OB베어가 법원의 강제집행에 사라지고 만다. 명도소송에서 패소한 후 시도된 마지막 기습 철거였다. 2배의 임차료를 내겠다는 제안도, 새 임차인이 제시한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도 거부되었다. 이 골목이 있게끔 터를 닦은 을지OB베어의 유무형 자산에 베풀 수 있는 아주 작은 아량마저 없었다. 만선호프가 배후에 있었다지만, 이는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다.
2000년대 후반 노가리 골목에 입성해 여러 가게를 차례로 인수해 공간을 오로지하던 만선호프도, 지금은 극심한 타격을 입고 있다. 골목에 불어닥친 재개발 때문이다.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뮌헨호프 자리에, 새 건물이 공사 중이다. 호프집이 밀집해있던 작은 사거리도 마찬가지다. 골목을 가꾸려 고민하는 자영업자들과 어떤 상의도 없었다. 업주들이 자비로 설치한 가로등마저 철거된 상태다. 2023년 7월 차 없는 거리마저 해제되어, 환하게 골목을 지배하던 밤 풍경도 이젠 볼 수 없다. 막무가내식 행정이 빚어낸 결과다. 이런 상황에 그 누가 맛과 멋으로 이 골목을 기억할 수 있을까.
예전처럼 이 골목에서 다양한 맛의 노가리와 생맥주를 경험하고 싶다. 을지OB베어도 만선호프도, 뮌헨호프와 또 다른 가게 안주도 다시 맛보고 싶다. 이게 생맥주를 즐기려는 기본 심리다. 재개발로 수십 년 쌓아온 골목의 건강한 문화가 무너져 내린다면 과연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자기 색깔을 지켜낼 수 있을까?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상생하자며 골목에 시민들이 붙여놓은 문구에 답이 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
맛과 장소기억
맛은 기억이다.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 또는 같이 즐긴 사람을 자연스레 연상한다. 맛은 또한 장소이며 멋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만 음미할 수 있는 분위기와 맛은 자연스럽게 그 공간과 거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백 년 넘게 여전한 맛을 지키고 있는 ‘이문설렁탕’은 이런 장소기억의 대표적 사례다.
같은 업종은 가급 한곳으로 모여야 한다. 모인 수만큼 맛은 각자의 개성과 비법을 갖춰야 한다. 소위 ‘힙지로’로 떠오른 골목은 맛과 멋, 공간을 소비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었다. 좋은 현상이었고, 새로운 변화를 일구려는 징조였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모든 게 사라지고 말았다. 2023년을 마감하는 12월 다시 찾은 골목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을지로 명물이라는 소식을 접했음이 분명한 외국이 몇이 황망한 표정으로 골목을 배회한다. 활기로 넘쳐나던 골목에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을지OB베어 등 골목을 떠나버린 여러 가게에서의 낭만이 새삼스럽다. 몇 년 전 가로수 길에서 내쫓김당한 소상공인을 생각한다. 서울미래유산이라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과거 수많은 가게를 생각한다. 유무형으로 지키고 가꿔야 할 골목이라 지정하고서, 정부는 어떤 보호장치조차 만들지 않고 있다. 그도 부족했던지, 깡그리 밀어 버리고 새 건물을 짓고 있다. 맛과 문화, 추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렇듯 소상공인 손발이 이 순간에도 무수히 잘려 나가고 있다.
을지OB베어가 만들어낸 북적이던 노가리 골목이 이럴진대, 자본이 옭아맨 굴레에서 어느 공간인들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이런 현실을 바꿔내지 못한다면, 백 년을 이어갈 가게는 허상이고 꿈일 수밖에 없다. 아니 당장 길거리에 내몰린다 해도 손쓸 방법이 없다. 아버지 손잡고 찾았던 오래된 가게와 골목은, 그래서 이젠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찾아갈 생각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황폐한 슬픔이다.
글.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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