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3. 09:04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Why is there a specific notion attached to font types?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와인바를 찾은 한 여성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와인바 라이터가 이게 뭐냐. 치킨집 라이터도 아니고.” 이 여성은 라이터 표면에 새긴 와인바 상호의 글씨체가 촌스럽다고 지적한 것이다.<사진1> 주인은 이렇게 답한다. “안 그래도 단가 높은 걸로 새로 주문했어.” 이 대화에서 현대인이 갖는 두 가지 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와인바에 어울리는 글꼴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쁜 글씨체를 얻으려면 돈을 좀 써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예쁜 글씨를 디자인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와인바에 맞는 글꼴을 찾아줘야 한다. 이 말은 특정한 관념에 부합하는 특정한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고딕체를 생각해 보자. 고딕체는 이탈리아의 인문학자들에게는 오랑캐의 글꼴로 인식되었다.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북쪽 오랑캐 고트족이 만든 글꼴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로마적인 글꼴인 로만체를 만들어 고딕체를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었다. 하지만 고딕체를 만들고 퍼뜨린 게르만 민족은 그 글꼴을 20세기 전반기까지 본문용 서체로 사용했다. 특히 나치는 고딕체를 민족의 글꼴로 여겨 나치를 선전하는 포스터에 적극 사용한 건 오늘날 남아 있는 나치 포스터와 책자 등을 통해 증명된다.<사진 2> 오늘날 네오나치들은 흔히 몸에 문신을 하는데, 마치 조폭들이 용 문신을 하는 것처럼 고딕체 글씨를 몸에 새긴다.<사진 3>
나치는 사라졌지만, 고딕체가 독일적이라는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증거는 수많은 독일 맥주 레이블에서 볼 수 있는 고딕체 로고다. 최근 일본 맥주들이 편의점에서 사라지면서 독일 맥주들이 늘었다. 독일 캔맥주 로고를 보면 고딕체가 흔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사진 4> 한국의 대기업 맥주 로고들도 대개 고딕체를 조금 가독성 있게 변형한 것이다.<사진 5> 고딕체의 특성은 획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뾰족한 것이다. 클라우드, 하이트, 카스는 한결같이 고딕체다. 한국 대기업 맥주들이 이토록 고딕체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맥주의 정통성이 독일에 있다고 보고 가장 독일적인 글꼴을 채택해 그런 정통성의 상징을 빌려온 것이 아니겠는가. 연희동에서 발견한 독일빵집의 간판 글씨는 한글이지만 최대한 로마자 고딕체처럼 디자인했다.<사진 6> 독일빵집을 주장하니 한글 글꼴도 로마자 고딕체처럼 보여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글자의 형태가 특정 지역과 시대를 연상시키는 사례로 투스칸 스타일 글꼴도 있다.<사진 7> 글자의 세리프가 물결 모양이고 세로획의 중간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글꼴이다. 이 글꼴은 원래 19세기 초 영국에서 처음 개발되었으나 오히려 미국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서부개척시대 시골 마을의 술집인 살룬(saloon)이 투스칸 스타일로 디자인된 것을 서부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투스칸 스타일은 서부 개척시대의 대표적인 글꼴이므로 서부영화의 타이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사진 8>
투스칸 스타일은 19세기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글꼴이었으므로 19세기에 탄생한 미국 프로야구 팀의 로고로 가장 많이 채택되었고 20세기 전반기까지 유행했다.<사진 9> 그 흔적은 20세기까지 이어져 보스턴 레드삭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뉴욕 메츠, 텍사스 레인저스 같은 팀들의 로고에 남아 있다.<사진 10> 투스칸 스타일은 미국 메이저리그는 물론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로고 글꼴이다. 그러다 보니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국가대표 야구팀의 서체도 투스칸 스타일이었다.<사진 11> 한국 야구인들에게 투스칸 스타일은 야구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글꼴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19세기 미국 서부개척시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글꼴이 있다. 웨스턴 스타일로 분류되는 이 글꼴은 모든 획의 굵기가 일정한 슬랩세리프(slab serif)에서 파생되었다.<사진 12> 웨스턴 스타일도 획의 굵기가 일정한 것은 슬랩세리프와 같은데 세리프의 굵기가 더 두껍다는 점이 다르다. 이 글꼴은 특히 19세기 현상금 포스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사진 13> 말 그대로 웨스턴 스타일 글꼴이다 보니 서부 영화의 타이틀과 포스터에서 가장 많이 쓰인 글꼴이 되었다. 성수동에 갔다가 ‘우디Woody’라는 상호의 이발소를 발견했다.<사진 14> 이름과 간판 배경색을 보니 연상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토이 스토리>다. 이름도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 우디로 지은 것이다. 우디는 카우보이다. 그렇다면 카우보이 우디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글꼴은 무엇일까? 카우보이는 19세기 서부개척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니 웨스턴 스타일 글꼴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이 글씨는 웨스턴 스타일의 원형인 슬랩세리프를 선택했다. 세리프를 더욱 두껍게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로만체나 산세리프체로 하는 것보다는 훨씬 적절한 선택이다. 서부시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21세기에 제작된 서부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대농장과 노예 학대로 악명 높은 남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흑인 장고와 인종주의를 혐오하는 현상금 사냥꾼이 미시시피주로 들어설 때 노예들이 비참하게 끌려가는 장면 위로 웨스턴 스타일 글꼴의 Mississippi 글자가 지나간다.<사진 15> 이것을 보는 순간 남부 백인 농장의 야만성이 떠올랐다. 그 글꼴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미시시피 버닝>이라는 영화를 아주 예전에 본 적이 있다. 1960년대 미시시피 주에서 벌어진 극악한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다. 그 영화를 보면서 이미 미시시피 주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니 <장고>에서 본 미시시피라는 글자의 형태는 더욱 의미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특정한 형태와 그것에 달라붙는 의미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어떤 사연과 역사성 때문에 특정한 형태는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기 마련이다. 글자의 모양에 어떤 인상이 부여되는 이유는 그것을 쓰는 주체의 성격과 관련된다. 특정 시대와 특정 지역,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가진 성격이 그들이 주로 쓰는 글꼴에 스며드는 것이다. 나는 웨스턴 스타일 글꼴에서 서부 개척시대 미국 백인들의 잔혹함을 읽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해석이고 의미 부여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글꼴에서 서부의 거친 황야나 진취성을 읽을 지도 모르겠다. 글자는 그것이 전달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진 형태까지도 독서를 요구한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 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 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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